[시애틀 수필-정동순] 세계 명작동화

정동순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장)

 

세계 명작동화


“혹시 책장 필요하지 않으세요? 제가 아는 분이 급히 한국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친교 시간에 교우인 은경 씨가 물었다. 귀가 번쩍 뜨였다. 마침 아래층 가족실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책을 정리할 책장이 필요한 터였다. 

이삿짐을 정리하는 그 댁에 도착하니 차고에 물건을 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얀색의 큰 책장 두 개는 마음에 들기도 하려니와 크기까지 우리 집에 꼭 맞는 물건이었다. 짐을 다 싣고 인사를 하려는데 은경 씨가 물었다. 

“여기 동화책이 많이 있는데, 혹시 한글학교에 필요할까요?” 

잘 정리된 책 박스가 쌓여 있었다. 책 욕심이 많은 나는 어떤 책인지 살펴보지도 않고 여러 박스의 책을 싣고 왔다. 책장은 자리를 잡고 집안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책으로 채워졌다. 

가져온 책 박스들을 열어 보았다. 한국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 다 사준다는 마법의 천자문 시리즈, Why 시리즈, 신기한 스쿨버스 등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만화 시리즈는 단어 해석과 함께 유적지와 유물 사진도 함께였다. 세계 명작동화 전집 80권이 있다. 

받아온 동화책을 차고에 오래 둘 수 없어 주인을 찾아 주려고 전화를 돌렸다. 한국어반 선생님께 혹시 교실에 비치할 한국어책이 필요하냐고 물었더니 책의 난도가 어느 정도냐고 한다. 페이지당 글자가 좀 많아 한국 기준으로 3~4학년쯤 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더니 자기 학생들에게는 좀 어려울 거라며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한다. 

한글학교 선생님 중에 초등생 자녀가 있는 분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연락하니, 집이 좁아 더 책을 놓을 공간이 없다고 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시리즈는 나중에 자료로 필요할 것 같아 대학 간 둘째 방에 있는 책장을 비우고 일단 들여놓았다. 신기한 스쿨버스나 Why 시리즈는 남아를 키우는 문우가 좋아하며 가져갔다. 

맨 마지막에 남은 세계 명작동화 시리즈 80권이었다. 동화 전집을 보는 마음이 회전목마를 타는 듯 오르락내리락했다. 집을 좀 치우고 살자고 결심한 일이 엊그제인데 책을 집안에 들여놓고 싶었다. 이 세계 명작동화 전집을 그때의 아이가 받았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동네 아이들, 아니 전교생을 다 찾아도 동화 전집을 가진 아이를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문화의 혜택이 없었다. 우리가 가진 책은 교과서와 동네에서 물려 물려 내려오는 모퉁이는 닳아빠지고 책장이 구릿빛으로 부풀어 오른 낡은 전과가 전부였다. 그것도 귀해서 낱말 뜻 찾아오기 숙제를 하려면 전과가 있는 친구네로 가곤 했다.

3학년 어느 날, 선생님이 동화책 두 권을 주셨다. <장화와 홍련>과 <동명성왕>이었다. 무료하게 빈둥거리다 심심하면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4학년이 되면서 학교 도서실 청소를 하게 되었는데, 오래되고 퀴퀴한 책들만 꽂혀 있었다. 게다가 책을 빌릴 수도 없었다. 그래도 청소가 끝나면 거기에 꽂힌 그 오래된 책들을 들춰보곤 했다. 6학년 때는 교실에 책장이 있었고 거기에 약간의 책이 꽂혀 있었다. 나는 점심시간에도 운동장에 나가는 것보다는 교실에 남아 책을 읽었다. 책에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많았다. 전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전나무는 어떤 나무일까? 이 빵은 왜 이렇게 생겼을까? 둥근 보름달 빵만 알던 내게 위가 볼록볼록 솟아있는 식빵은 이상하기만 했다.

차고에서 세계 명작동화 몇 권을 펼쳐 보았다. 표지도 그림도 너무나 세련되었다. 둘째 방으로 책을 옮기기 시작했다. 스무 권쯤 정리했을 때였다. 책을 버려야 집이 정리가 될 터인데, 반대로 꼭 필요하지도 않은 책을 집으로 들이고 있는 내가 한심했다. 책꽂이에 정리하려던 책을 빼내 끙끙대며 다시 차고로 옮겼다. 

너무나 아름다운 책들. 하지만 작아서 더 이상 입지 못할 옷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옷장에 넣어두고 십수 년의 시간을 보낸 일을 생각했다. 작은 집에 살면서 필요하지 않은 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호더 증후군은 아니더라도 일종의 애착 증후군이 아닌가. 

세계 명작동화 80권을 트렁크에 실었다. 헌책을 사 주는 중고 서점으로 갔다. 책이 더 필요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세 박스의 무거운 책을 실은 책수레를 밀면서도 다시 집으로 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점원에게 책 수레를 갖다주니, 책을 정리해 가격을 알려줄 테니 한 시간 후에 오라고 했다. 

근처에서 장을 보고, 시간에 맞추어 서점에 갔다. 책들이 카트 위에 가지런히 세워져 있었다. 줄지어 있는 책들을 보니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했다. 그 책들이 나에게 말하는 듯했다. ‘우리를 다시 집에 데려가요. 어린 시절의 그 작은 아이에게 가끔 동화를 읽어주지 그래요?’ 묘한 슬픔이 밀려왔다. 망설이는 내게 점원이 가격을 제시하며 물었다. 

“이 가격으로 우리에게 주는 것에 동의해요?”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세계 명작 동화책이 다른 중고 책들 틈으로 섞여 들어갔다. 뒤돌아 서점을 나오는데 뭐가 무너져 내리는 듯 가슴이 아팠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떼어 놓는 엄마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지 말걸. 가끔 그 동화책을 읽으면서 결핍이 많았던 내 안의 그 아이를 달래 줄 걸...어른이 된 지금에야 깨달아지는 것이 있을 텐데...그 책을 생각하면 지금도 여전히 후회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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