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공순해] 두더지 일곱마리

공순해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두더지 일곱 마리 


내 안에는 두더지 일곱 마리가 산다. 교만, 인색, 시기, 음욕, 탐욕, 나태, 분노. 이는 다 결핍과 두려움을 부모로 하여 태어난 자식들이다. 사촌쯤으론 불만과 불평이 있다. 이 일가 족속에 끄들려 하루가 편치 않게 흘러간다. 특히 연말이 되면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지난해는 10월쯤 하여 미리 작심했다. 소위,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고, 지금 고독한 사람은 오랫동안 외롭게 살아가고, 지금 잠 못 이루는 사람은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라는 철을 맞아, 불안스레 이리저리 헤매지 말자고 작심했다. 이리저리 헤매게 만드는 심적 뿌리가 두더지 일곱 마리에 있으므로 더는 두더지에게 끌려 다니지 말자고 작심했다. 

학생 시절, 우리집에 와 묵으며 NYU에서 일 년 어학 연수를 마친 조카가 저녁마다 나가서 두더지 게임을 한다고 시누님이 말씀하신 적이 있다. 땀 뻘뻘 흘리며 시간이 넘게 두더지 머리통을 때려잡아야만 집에 돌아온다고. 그애는 자칭 한국의 마지막 국보(國寶)였다. 그만큼 모범생이었다. 그런 애가 두더지 머리통을 섬멸해야만 집에 돌아온다니, 문화 충격에 의한 갈등이 얼마나 심했으면 그랬을까. 그게 그 아이의 충격과 갈등에 대한 해결 방법이려니 여겼다. 올해 문득 그 애 생각이 난 건 그 애의 처지에 공감이 돼서였다. 

한 해를 마무리하려 하면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갈등이었다. 후회하지 않을 만큼 잘 지냈나, 돌아보면 어느것 하나 흡족한 점이 없었다. 나누며 살았나 돌아보면 인색했고, 너그러웠나 하면 옹졸했고, 근면했나 돌아보면 시간을 낭비했다. 하여 두더지 일곱 마리가 계속 머리를 내밀며 자신을 불만 속으로 몰고 갔다. 그래서 작심했다. 올해부턴 연말이면 나도 두더지 게임을 해야겠다. 후회의 감정이 치받치면 두더지 머리통을 깨부수듯 감정을 눌러 평안을 유지하면 되지 않겠나. 평온한 수면이 뒤집히는 건 감정의 기복에서 오는 것. 감정을 통제해 평온한 연말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어느 순간 교만의 두더지가 머리를 들면 꽝 내리쳤고, 나태의 두더지가 머리를 내밀어도 꽝 내리쳤다.

교만은 겸손의 상전이다.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어느 순간 보면 교만이 머리를 내밀고 겸손을 비웃고 있었다. 솔직히 까놓고 보면 겸손이란 포장이 결국 교만이었더라는 부끄러움.

인색은 어떠한가. 자신은 너그럽다고 생각하나 그것 또한 자기 중심의 판단이어서 결국 관용은 아니었다. 객관화가 되지 않은 관용은 관용이 아니다.

시기도 그렇다. 자신은 경쟁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고 여겨 왔지만 결국 그 일원으로 살다 보니 물들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피해 갈 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가 경쟁으로 나올 때 나도 모르게 휩쓸려 은원을 주고 받게 된다. 용서라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처럼.

음욕은 반드시 성적 충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리적인 것, 본능적인 것을 말한다. 본능에 지배받지 않는 생명체가 있을까. 이성적인 정절을 유지할 수 있는 절대불변의 존재가 있을까. <스쿠르테이프의 편지>에서 C. S 루이스는 말한다. 인간은 인간적이라고 말하는 그 인간적인 단어에서 면죄부를 얻으려 한다고. 

탐욕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다. 소비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며 갖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자가 어디 있겠나. 절제한다고 생각하지만 살다 보면 어느덧 금 밖으로 나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물자 소비와 환경 오염에 이르면 더더욱 자신 없어진다.

나태 또한 그렇다. 자신은 본인이 근면하다고 생각하지만 어느덧 선을 넘어 버린 자신을 수시로 발견할 때의 실망이라니…

하여 분노에 이르러 인내와 거리가 먼 자신을 발견할 뿐이었다. 

이래서 이 일곱 마리 두더지의 머리를 모조리 두들겨 조금도 머리를 내밀지 못하도록 내리치며 연말을 보냈다. 수면이 잔잔한 호수처럼 일상의 평온이 유지됐다. 

그러나 이렇게 연말을 보내고 나자 부작용이 일었다. 평온이 유지된 대신 글을 한 편도 못 썼다. 줄잡아 두 달 동안 아무 실마리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속에서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데 무슨 실마리가 일어나랴. 지난 연말에 깨달은 결국의 결론은 두더지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거는 피할 수 없는 생장 조건이라는 깨달음. 죄가 깊은 곳에 은혜가 깊다고, 일을 저질러 봐야 결과도 있다는 깨달음. 하던 대로 해. 의도하지 말고 이대로 그냥 주욱 살아가. 계획은 내가 하지만 이루시는 분은 따로 있잖아. 마음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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