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생활-김 준 장로] 고난주간에

김 준 장로(종교칼럼니스트)

 

고난주간에


여러 해 전 부활절을 앞둔 고난주간에 우리 교회에서는 특별 새벽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주님이 겪으신 정신적 고뇌와 십자가의 고난에 마음으로 나마 동참하고자 하는 기도회였습니다.

수요일이었습니다. 그날 아침에는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시기 전에 50대 여성들로 구성된 한나선교회원들의 찬양이 있었습니다. 지천명(知天命)의 세월을 넘어 이제 가정의 어머니로서나 교회의 성도로서나 원숙한 신앙의 연륜으로 다져진 그들의 온화하고 후덕한 모습만으로도 경건한 기도회의 분위기를 한껏 높여주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고요한 침묵을 헤치며 숙연하면서도 은은한 찬송곡이 흘러나왔습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님 그 십자가에 달릴 때(147장)” 

첫 절을 듣는 순간 내 눈에는 갈보리산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의 모습이 그 현장에서 보듯이 선명하게 떠오르면서 그 찬송가의 가사가 마치 나를 향해, “거기 너 있었느냐 그때에 내가 그 십자가를 질 때”라고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왔습니다. 

그 물으심에 나는 속으로 ‘아닙니다. 그때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십자가에 달려 고통 당하시는 주님을 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순간 내 가슴은 고동치기 시작했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송곳처럼 예리한 가시로 엮은 면류관에 찢겨지신 주님의 머리, 거기에서 흐르는 선혈이 얼굴을 타고 주르르 흐르는 그 모습을 보면서 어찌 떨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양 손에 대못이 박힐 때마다 비명 소리와 함께 못박히시던 손의 손가락들이 바르르 떨던 그 장면을 보고 어찌 떨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부족해서 전투용 장창(長槍)으로 연약하신 몸을 마구 찔러 물과 피가 십자가 밑으로 흘러내려 마른 흙을 흥건히 적시던 그 참상을 보고 어찌 떨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찬송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해가 그 밝은 빛을 잃을 때.” 밝은 해가 빛을 잃었습니다. 오전 9시경에 십자가에 달리신 주민이 임종하시기 전 3시간 동안, 12시부터 3시까지, 온 땅이 어두움으로 변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세상의 불의 앞에 침노를 당하고, 하나님의 선이 인간 악에게 농락을 당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증오 앞에 버림을 받는 순간을 상징으로 나타내신 사건이 아니었을까요.

어두움이 태양 빛을 가리듯이 하나님의 의를 침노하고 하나님의 선을 농락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광명을 흑암으로 덮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증오로 갚은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로마 병정들이었습니까. 제사장들이었습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까. 그것은 어느 특정 부류의 사람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주역은 바로 인간이라는 이름을 가진 우리 모두였습니다. 

나는 주님이 당하신 고난의 현장을 영안으로 바라보면서 예수를 처형하라고 외치는 군중들에게 분노하여 떨었고, 주님이 당하시는 처절한 고통에 동참하며 떨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떨림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고통을 가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의 떨림도 아니었고, 주님이 당하시는 처참한 모습에 몸서리치는 떨림 만도 아니었습니다. 그 떨림은 주님으로 하여금 그 끔찍한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실려야 피하실 수 없도록 만든 그 죄악의 실체가 바로 나 자신 임을 깨달으면서 뼈저린 통회와 함께 밀려오는 강렬한 진동의 떨림이었습니다. 

그 떨림 속에서 나는 또다시 십자가 고난의 참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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