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김윤선] 똑똑하지 않기

김윤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똑똑하지 않기 

 

여고 동기회 방, 톡톡 튀는 재치와 위로의 말들이 따습다. 재치있고 유머러스하게 분위기를 띄우는 말도 있고 어쩜 저리도 살갑게 표현할까 싶은 말도 있다. 익살 섞인 사투리에서는 독특한 정감이 배어 있다. 말에도 온도가 있다는 걸 느낀다. 

별주부전에 나오는 토끼의 재치는 언제 들어도 그 영특함에 웃음이 돈다. 용왕이시여, 제 간의 효험을 알아 구하려는 이들이 많아서 저는 그것을 함부로 갖고 다니지 않습니다. 오늘은 날씨가 하도 화창해서 간을 양지바른 너럭바위에 널어놓고 왔는데 용왕님께서 위중하시다는 말을 진작 듣지 못한 터, 지금 당장 육지에 나가서 그것을 걷어오겠나이다, 라고 했다나. 

반면, 말실수로 체면을 구긴 정치인이 있다. 60, 70대는 투표하지 않아도 된다는 망언에 정치 판도가 바뀌었다고 한다. 젊은이들의 투표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는 하나 콕 집어 지목된 사람들로서는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학자들 말로는 말실수라는 게 무의식에 살아 있는 말이 무심코 튀어나온 것이어서 말한 이의 의도와 영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실수한 말에도 책임을 벗어날 수 없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선거를 앞두고 말의 홍수를 이루는 요즘, 그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크게 다가온다. 

살다 보면 가끔 서로 의견 대립이 생길 때가 있다. 양측 주장이 거셀수록 편이 갈라지고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그럴 때 뜬금없이 끼어드는 게 있다. 상대를 험담하는 말과 이간질하는 말, 말이 불길을 지피는 기름이다. 그래서인지 불교에서는 경을 읽을 때 입으로 지은 죄를 씻는 진언부터 외운다. 거짓말, 아첨하는 말, 이간질하는 말, 욕설 등이 다 입놀림에서 비롯되지 않던가.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낭패를 당하게도 하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묵언이 눈길을 끈다. 묵언 수행은 관심을 오로지 자기에게 집중하며 자신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는 공부라고 한다. 말은 밖으로 치닫는 연습이며 묵언은 안으로 치닫는 공부다. 말할 때는 관심이 밖으로 향하게 돼서 제 마음 살피기가 쉽지 않다. 진실한 기도는 말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원초적인 침묵으로 이루어진다고 한 법정 스님의 말도 같은 의미일 테다. 그래서인지 말 많은 사람을 보면 진실성이 부족해 보이기도 하다. 

시집의 분위기와 친정의 분위기는 참 달랐다. 시누이들의 대화는 정스럽고 애정 표현에도 스스럼이 없어서 낯설고 어려운 마음에 곧잘 위로됐다. 반면, 친정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칭찬에도 인색했지만, 꾸중이나 간섭도 아꼈다. 어떤 땐 잘못을 알고서도 내색하지 않으니 되레 우리가 더 긴장했다. 어쩜 그건 정반합의 과정처럼 스스로 절충점을 찾아갈 것이라는 자식들에 대한 믿음과 존중 아니었을까. 정말이지 한 번씩 듣는 아버지의 훈육에 우리는 눈물을 쏙 빼곤 했다. 

살아오면서 나는 어떤 말들을 많이 했을까. 격려보다는 힐책을, 실망스러운 말로 한순간에 상대를 등 돌리게 하지는 않았을까. 위로랍시고 한 말이 상처에 소금 뿌리듯 상대의 아픔을 더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바람이 있다면 적어도 강직함을 덧입힌 자기기만으로 가득 찬 내 주장만은 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나이 40을 넘어서도 시비 가리는 일에 똑똑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좋아할 일이 아니다. 덕德이 없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뿐이라는 말을 기억한다. 나잇값 하기가 쉽지 않다. 똑똑하지 않기가 똑똑하기보다 힘든 세상이다.

요즘 들어 친구들의 말에 자주 동감한다. 그건 함께 세상을 살아오면서 겪은 동질의 세대의식과 행간의 뜻을 먼저 이해하려는 단단한 우정을 보는 까닭이다. 어쩜 그 밑바닥엔 서로 말하지 않아도 시비를 가리고 싶지 않은, 더는 똑똑할 필요가 없다는 삶의 순리를 깨달은 게 아닐까. 서로를 위로하고 용기를 부추기는 친구들의 말에서 해묵은 술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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