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전병두] 거리
- 24-02-15
전병두 목사(오리건 유진한인장로교회 담임)
거리
“간호사님, 참 예뻐보이는 군요“
혈압을 측정하러 들어 온 간호사에게 밝은 미소와 함께 던진 아침인사였다.
”고맙습니다. 오늘은 좀 어떠세요?“
”아주 좋아요. 잘 보살펴 주셔서요...“
한씨가 입원한 지도 벌써 한 주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팔십이 넘게 살아오는 동안 감기 한번 제대로 앓아본 적 없을 정도로 건강했던 그였다.
그러나 두어 달 전에 넘어진 일이 있은 후 급격히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부인은 걱정이 되었다. 병원에 갈 일이 없다고 하는 남편의 말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종일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 안스러웠다.
부인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응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에서는 혈액검사, 단층촬영 등으로 몇 시간의 진료 후 그에게 두 차례의 뇌출혈이 있었다는 것과 폐에 물이 차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곧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정밀 검사를 시작하였다.
한씨 자신뿐만 아니라 부인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씨 부부는 미국으로 이민 온 후 하루도 쉴 날이 없었다. 편의점을 열기도 했고 햄버거도 장사도 했었다. 엘에이에서 뉴욕으로 옮겨가 더 열심히 일했다. 이곳 오레곤으로 오기 전에는 알라스카에서 세탁소를 운영했었다. 한인들이 별로 살지 않는 곳이었지만 군부대가 가까이 있어서 제법 규모를 갗춘 사업으로 번창했다. 빨래방도 겸하여 그 지역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업이었다.
피곤으로 지친 한씨 부인이 병원을 찾았을 때는 신장기능이 거의 마비된 상태였다. 한씨는 부인의 투석을 위해서 일주일이면 사흘을 병원으로 향했다. 이식을 기다리던 중 마침 혈액에 맞는 신장 기능자가 나타나 무사히 이식을 할 수 있었다. 남편은 언제나 든든한 기둥이었다. 병든 부인에게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나 주저하지 않았다. 알라스카의 눈바람에 힘들어 하는 부인을 위하여 따뜻한 곳으로 이사를 하기로 결심한 것도 남편이었다.
오레곤주로 내려와 스프링필드에서 식당을 인수하였다. 여러해 동안 열심히 일하였다. 착한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늦도록 일을 해 주는 것이 큰 힘이되었다. 한씨 부부는 저녁 늦게 식당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맞이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아들은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오곤했다.
그날도 아들은 열 한시가 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손에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이 들려져 있었다. 소파에 앉아서 함께 이야기하던 아들이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잠에 빠졌다.
”아들아, 피곤하지 방으로 들어가서 편히 누워자거라...“ 어머니의 따뜻한 손이 아들의 손목을 잡았다. 아들은 말이 없었다. 머리를 들지도 않았다. 조용히 잠이들었다. 그 잠은 영원한 잠이었다. 한씨 부부는 할 말을 잊었다. 정신없이 장례를 치루고 난 후 집안은 언제나 침묵이 흐를 뿐이었다.
2월은 아들이 세상을 떠난 달이다. 한씨가 입원을 하고 부인은 지팡이에 의지하여 입원실로 들어선다.
”여보... 당신을 기다렸어...“ 무거운 남편의 입이 열렸다. 부인은 할 말을 잊곤했다.
폐전문 의사가 입원실로 들어섰다. 부인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남편께서는 폐암 4기입니다. 전신에 세포가 퍼져서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없게되었습니다. 목까지 암 세포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부인은 보호자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어떤 말도 할 기력이 없었다. 의사는 하던 말을 중단하고 병실을 나갔다.
생과 사의 간격이 이렇게 가까울 수가 있을까? 꿈 많던 어린 시절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며 친구들과 수다떨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가 아주 멀어만 보였다. 그러나 태평양을 건너보니 그 거리는 한 뼘도 안되는 것처럼 보였다. 남편의 팔십 평생이 아주 길어 보였었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 계단에서 돌아보니 일생은 반 뼘의 거리도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남은 자신의 앞날은 그 보다도 더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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