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수필-전진주] 백 년 세월 동안
- 24-01-03
전진주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백 년 세월 동안
오월에 이스탄불에서 아테네까지 크루즈 여행을 다녀왔다. 시애틀의 초여름은 로디Rhdody 꽃으로 덮이고 이제 막 피어나는 연초록 잎들이 숲마다 환하게 샹들리에를 매달고 있었다. 아무 일 없이도 가슴이 부푸는 때였다. 굳이 여행을 떠나기보단 머물고 싶은 계절이었다. 하지만 회사 일이 바쁜 때라 망설이는 남편을 부추겨 결혼 40주년 기념 여행을 떠났다.
크루즈 여행의 가장 좋은 점은 여장을 풀고 다시 싸는 번거로움이 없다는 것이다. 일단 승선을 하고 나니 호텔과 식당과 극장이 한 곳에 있었고 함께 떠난 친구 부부가 바로 옆 방에 있었다. 밤새 배가 바다를 헤치고 달렸고 아침에 눈을 뜨면 새로운 명승지 고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페소, 로즈 아일랜드, 마케도니아를 거쳐 아테네까지의 먼 여정을 보름간 다녀오며 마냥 즐거울 수 있었다. 그것은 정말 가상현실 체험이었다.
그 후유증은 한동안 밥 짓기 싫어진다는 것이다. 한인 시장이든 코스코든 여기저기 운전하고 주차장을 헤매고 카트를 미는 장보기 그리고 세 개의 냉장고 정리와 청소 등으로 시작되는 끝없는 가사에서 놓여나 오스만 제국의 왕녀가 되었던 황홀한 기억을 언제까지고 연장하고픈 마음이다. 현실로 돌아온다는 것은 귀족이라도 된 듯 우아하게 차려입고 향기로운 만찬을 정중하게 서빙을 받다가 갑자기 밤 12시 종소리에 마법이 풀리고 깨진 호박 조각 사이에 뒹구는 느낌이랄까.
돌아온 현실에는 가장 먼저 건강이 위태로운 친정엄마의 입원과 병간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동네 고양이에게 귀와 배를 마구 물어뜯긴, 이제는 훌쩍 13살이 된 리오를 동물병원에 입원시켜야 하는 일도 겹쳤다. 장거리 비행의 여독을 풀지도 못하고 북으로 남으로 55마일을 운전했다. 틈틈이 반찬을 만들어 첫아기를 낳고 쩔쩔매는 둘째에게 날랐다.
유월에 첫 손자 돌잔치와 엄마의 장례식을 치렀다. 칠월엔 서울에 가서 예정대로 훈련을 마치고 돌아왔다. 팔월부터 시월까지 곳곳에서 손님이 우리를 방문했다. 모두 십오 년 만에 찾아오신 반가운 분들이었다. 덕분에 우리도 다시 여행객이 되어 시애틀 워터 프런트와 연어가 올라오는 이사콰 냇가와 독일마을 여행을 했다.
시월에 막내가 아파 입원했다. 맨 먼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여행과 잔치와 즐거움으로 가득 찼던 일상이 흔들렸다. 아흔셋에 돌아가신 엄마가 너무나 아쉬웠다. 그냥 무턱대고 엄마 생각이 났다. 돌아가실 무렵의 힘없고 노쇠한 엄마가 아닌 젊은 날의 엄마 꿈도 마구 꾸었다. 그냥 엄마가 옆에 있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리움인가 안타까움인가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부엌데기로 종종걸음을 치는 평범한 일상이 따분하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이것은 만사가 무탈할 때나 할 수 있는 생각이다. 광야 같은 인생길에 심한 모래바람이 불면 구덩이를 파고 틀어박힌 채 깜깜한 그곳에서 다시는 나오고 싶지 않아진다.
여기저기 도움받을 곳을 알아보다 이참에 우리도 부부 상담을 받아보기로 했다. 축복은 고난이란 가면을 쓰고 찾아온다고 했던가. 상담 받은 지 겨우 세 번째, 우리 부부는 각기 자신에 대하여 아주 놀라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갖고 살아온 가치관과 정체성에 대하여도 새롭게 생각을 하게 되었다.
휴스턴의 큰딸이 가장 먼저 기뻐해 주었다. 가족 카카오 방에는 매일 부모를 격려하고 사랑한다는 하트가 올라온다. 막내도 점점 안정을 찾고 있다. 두렵기만 하던 내일, 사랑의 힘으로 물리칠 용기가 난다. 아침에 눈을 뜨고 창문의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는 팔에 힘을 준다. 새날에 새 힘을 주시니 감사하다. 이제야 겨우 새해가 밝아 오는 것이 괜찮아진다.
엄마는 백 년 가까운 세월에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나도 그렇게 오래 살게 될까?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를 감사하는 기쁨과 평안으로 채우고 상대에게 그 평안을 전할 수 있다면 오래도록 살아도 될 것 같다.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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