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수필-이 에스더] 꽃을 드려요
- 24-01-02
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꽃을 드려요
꼭 한 번 와 보고 싶은 집이었다. 앙증맞은 빨간 벤치에 조그만 버킷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고, 바로 옆에는 작은 도서함이 세워져 있다. 손으로 쓴 FREE 표지판이 수줍은 듯 벤치의 한쪽에 자리하고 있다.
수령이 족히 오십 년은 넘어 보이는 나무들이 집 주위를 감싸고 있다. 붉은 벽돌과 나무로 지어진 집이 아늑하고 편안해 보인다. 가지런한 담장에는 집주인의 세심한 손길이 배어 있다. 담장 넘어 널찍한 뒷마당에서는 꽃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을 것 같다.
어느 날, 친구가 사는 동네에 꽃을 거저 주는 집이 있다고 했다. 자기 집 마당에 핀 꽃으로 꽃다발을 만들어 집 앞에 내놓는 이웃이 있단다. 얼마 전 산책길에서 들고 온 꽃 이야기를 하는 친구의 얼굴이 꽃처럼 환했다. 그 집은 물론 집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친구에게 사진이라도 보고 싶다고 했더니 산책길에 찍은 사진을 보내 주었다. 결국 주소를 물어 마침내 집에까지 오게 되었다.
오래 전에 내가 살았던 동네와 가까운 곳,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갑고 정겹다. 곁에 선 나무의 가지를 따라 뻗어가던 생각들이 가지 끝에 주렁주렁 매달린다. 집주인의 그림자라도 보았으면 했는데, 상상 속에서 만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그 집 앞에 잠시 머물며 딴생각의 열매들이 품에 가득하다. 꽃다발을 안은 것보다 더 큰 감동이 향기롭다. 오늘은 어떤 꽃이 누구의 가슴을 환히 밝히며 미소 짓게 했을까.
늦가을의 쌀쌀한 날이었다. 천사 같은 아기의 엄마가 선물이라며 무언가를 손에 꼭 쥐여 주었다. 아기 주먹만 한 사탕이 들어 있음 직한 포장이었다. 특별한 게 있을 것 같아 손놀림이 빨라졌다. 리본을 풀고 천을 펼치자 두툼한 종이가 동그란 무엇을 감싸고 있었다. 포장지를 펴는 손에 가느다란 온기 같은 게 느껴졌다. 큼직한 알뿌리가 그 안에서 새근새근 잠자고 있었다. 아, 아가야.
천사처럼 고운 아기는 아픈 데를 안고 세상에 왔다. 신생아 병동에 오랫동안 머물러야 했던 아기를 지켜보며 보내준 엄마의 기도 편지가 아기를 마음에 품게 했다. 엄청난 고통의 무게를 묵묵히 감당하며 그 가운데서도 감사를 찾는 엄마의 영혼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아기에게 몇 차례 어려움이 있었지만, 무사히 백일을 맞은 아기가 너무나 대견하고 장했다. 그 가족들이 자랑스럽고 고마웠다. 모두를 한마음으로 묶어 준 아기는 모두에게 예쁘고 소중한 선물이 되었다.
살짝 드러난 구근의 뽀얀 살갗이 아기의 볼 같다. 추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꽃대에 물이 차오르듯 아기의 몸에도 강인한 생명의 기운이 힘차게 뻗어 오르기를 바란다. 아기를 위해 기도해 준 이들에게 알뿌리를 전해주던 엄마의 손길을 잊을 수 없다. 뿌리 하나하나에 담긴 엄마의 마음이, 엄마의 기도가 아기의 겨울을 잘 지켜 주리라 믿는다.
문득 아기 엄마의 모습과 그 집 안주인이 똑 닮았을 거라는 조금은 억지스러운 상상을 펼친다. 꽃다발을 만들어 길가에 내놓고, 작은 도서함에 책을 넣어두는 기쁨의 씨앗을 뿌리는 이라면 아기 엄마처럼 동그란 얼굴에 미소가 고운 사람일 게다. 어쩌면 후덕한 인상의 맘 좋은 할머니일 수도 있겠다.
봄이 오면 튤립과 수선화가 가득할 그 집 마당을 그려본다. 아기의 볼처럼 사랑스러운 튤립이 방긋방긋 웃고, 별을 닮은 수선화가 노란 희망처럼 무리 지어 핀 정원에서 까르륵까르륵 웃는 아기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오늘 밤 꿈속에서 그 집을 찾아가 고마움을 담은 카드 한 장 슬그머니 끼워놓고 싶다. 누군가 꽃다발을 가져가며 버킷 안에 넣어두었을 마음 조각들 위에 내 마음 한 조각 보태고 싶은 것이다.
또 한 해를 맞으며, 꽃을 나누고 구근을 나누던 이들과 천사 같은 아이의 눈망울을 생각한다. 생명을 붙들고 사랑과 희망을 기도하며 꽃을 나누는 마음들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꽃 등불이 되고, 한 해를 살아낼 넉넉한 힘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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