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문해성] 미역국을 좋아했던가
- 23-12-25
문해성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미역국을 좋아했던가
동생 말을 듣고 미역국을 끓여 보기로 했다. 성인이 된 후 처음 끓이는 미역국이다. 미역국을 언제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정해진 공식처럼 엄마는 생일 때마다 미역국은 먹었느냐고 묻는다. 세상에 맛있는 음식이 널려 있는데 왜 맛없는 미역국을 먹어야 하느냐고 퉁명스럽게 대답하곤 했다.
실은 바다에서 나는 음식은 뭐든 좋아하고 잘 먹는다. 특히 섬에서 자란 어린 시절 바다에서 갓 따온 미역을 데쳐 초고추장에 찍어 먹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짭조름하면서 부드러운 바다향이 온몸으로 스며드는 그 맛. 미역국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수 있다.
미역국을 안 먹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 날 하필 엄마는 미역국을 끓였다. 그날이 시험 날인 걸 깜빡하고 무심코 끓였을 수 있지만, 눈물이 날 만큼 서러웠다. 흔히 듣게 되는 미역국을 먹으면 미끄러진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왜 아침밥을 먹지 않느냐는 엄마의 물음에 대꾸도 없이 시험장으로 갔던 기억이 있다. 미역국을 생각하면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그 후로 나는 미역국을 끓이지도 먹지도 않았다. 오랫동안 의식적으로 거의 잊고 살았다.
얼음이 채 녹지 않은 이른 봄날, 막냇동생이 태어났다. 엄마는 출산하면 한 달 동안 절대로 찬물을 만지면 안 된다고 믿고 있었다. 엄마를 그렇게 돌봐 주던 할머니가 안 계셔서 동생과 내가 엄마를 챙겨야 했다.
내 나이 11살, 미역을 빨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미역을 씻으려고 우물가에 가져가면 동네 아주머니들의 참견이 많았다. 빨래하듯이 힘주어 빡빡 주물러 짠물이 다 빠지도록 여러 번 잘 헹구라고. 일러준 대로 하자, 미끈미끈한 미역에서 하얀 거품이 마치 비누 빨래를 하는 것 같았다. 거품이 다 사라질 즈음이면 빨개진 손은 감각이 없었다.
겨우 입김으로 손을 데우며 집에 와서 쌀뜨물을 붓고 미역국을 끓였다. 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참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린 미역국을 한 양푼 퍼서 박 바가지에 고봉으로 담은 쌀밥과 함께 상을 들였다.
얼마 전 동생과 통화 중에 엄마가 올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줬다는 것을 시작으로 막냇동생이 태어났을 때 이야기로 이어졌다. 동생은 식사를 끝낸 엄마의 상을 들고나올 때 내가 늘 물었던 말이 있다고 했다.
“엄마가 오늘도 밥 안 남겼어?” 동생이 고개를 끄덕이면 실망한 표정으로 빈 그릇을 보던 내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전날보다 쌀을 한 줌씩 더 많이 해서 밥을 지었지만, 엄마가 밥을 남기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동생 말에 의하면 나는 유독 쌀밥에만 관심이 있었다고. 가마솥에 지은 쌀밥 냄새가 입맛을 다시게 했지만, 그때 우리는 엄마가 먹고 남겨야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알았다. 동생과 나는 그때 일을 떠 올리며 한바탕 웃었다. “언니 그때 못 먹은 쌀밥 이제 실컷 먹어.”
그런데 내게는 미역국에 대한 기억만 있을 뿐 쌀밥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매일 힘들게 미역을 씻던 것과 국을 담았던 노란 양푼까지 생생한데, 동생에겐 미역국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 대신 쌀밥과 함께 그것을 몹시도 먹고 싶어 했던 내 모습만 아주 선명하게 기억할 뿐이다.
내 기억 속에는 없지만 정황상 동생 말이 맞을 것 같다. 그렇게 먹고 싶어 했던 쌀밥이 기억에서 무심결에 떠난 걸 보면 아마 싫어하는 미역국도 기억에 잘못 입력된 게 아닐까.
갑자기 엄마의 기억도 궁금하다. 엄마한테 한 번도 이 얘기를 꺼낸 적이 없다. 엄마도 어쩌면 그때 일을 전혀 다르게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한 달 동안 찬물을 손대면 안 된다고 했지만, 어린 딸들이 해준 밥을 계속 받아먹을 수 없어 일찍 부엌에 들어왔던 것 같다. 엄마는 원래 임신 중에는 거의 밥을 먹지 못하다가 출산하고 나면 밥맛이 폭풍처럼 생긴다고 했다. 게다가 아이들이 해주는 밥이니 애틋하고 미안해서도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반찬 없이 매일 똑같이 먹는 미역국과 밥이 우리가 그렇게 먹고 싶어 하던 그런 맛은 아니었을 것이다.
누구나 자기의 기억을 믿는 편이다. 그런데 기억이란 누구나 똑같이 저장되는 게 아니었다. 함께 있었던 시간에 일어난 같은 사건의 다른 기억. 무의식 중에 저장되는 기억이 동생과 나의 기억처럼 다르게 저장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미역국이 보글보글 끓어오른다. 미역국을 애써 외면했던 마음, 좋아하지 않는다고 스스로에게 걸었던 주문을 모두 집어넣고 한소끔 더 끓인다. 부풀어 오른 거품이 한바탕 뒤집히며 서로를 끌어안는다. 동생 말처럼 이 맛있는 음식을 필요 없는 기억에 갇혀서 멀리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불을 끄자, 모든 재료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내 마음에 평온이 찾아온 것처럼 잠잠해진다. 큰 대접에 넘치도록 미역국을 채운다. 드넓은 바다향이 입안 가득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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