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문해성] 엄마와 글

문해성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엄마와 글 


한 자 한 자에 온 신경을 집중하여 읽어간다. 흘러내리는 돋보기를 끌어 올리며 몇 시간째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한다. 그녀가 열심히 읽고 있는 것은 딸이 쓴 세 쪽 분량의 글이다. 미처 자신이 몰랐던 딸이 살아온 시간과 맞닥뜨린 순간,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힘들었을 딸의 모습이 눈에 선하여 “아이고 내 새끼!”소리가 절로 나온다. 딸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건만.

나의 등단 작품이 실린 책을 엄마는 온종일 붙들고 있었다. 내게는 그저 추억으로 남은 시간이 엄마에게는 잊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느낌이었나 보다. 마치 빠져 있던 중요한 사진을 찾아 앨범 속에 끼워 넣는 것처럼. 통화 중에 간간이, 아이고 내 새끼, 하며 엄마가 내뱉을 때마다 그 마음이 전해져 왔다. 얼마나 여러 번 읽었는지 문장 하나하나를 다 외우고 있었다. 

엄마의 책 읽는 모습을 보았다. 평생 일만 하던 엄마가 어느 날 교회에 가겠다고 했다.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은퇴와 함께 선언한 것이다. 그 단호함에 집안의 누구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펼쳐 든 책이 성경이었다. 내가 본 엄마의 책 읽는 첫 모습이었다.

엄마는 생각처럼 글이 술술 잘 읽히지 않는다며 돋보기를 찾았다. 너무 오랜만에 대하는 글자가 생경했을까. 사 십여 년 동안 엄마는 책은 고사하고 글자마저 가까이할 틈이 없었다. 먹고 사는 일에 바빴던 엄마에게 글은 사치스러운 것이었는지 모른다. 글자가 크면 읽는 데 도움이 될까 하고 서점에서 판매하는 성경책 중에 제일 큰 것으로 사드렸다. 단어도, 문장도, 문맥도 아닌 글자 하나하나를 더듬어 가는 엄마의 글 읽기는 더디게만 보였다. 

지나 온 세월만큼이나 힘들어 보였던 엄마의 글 읽기는 끈기와 믿음이었다. 두 번의 성경 완독과 한 번의 필사를 마쳤을 때, 그것은 어떤 학위에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또한 사위와 몇 마디라도 나누고 싶다며 영어에 도전했다. 겨우 당신의 이름과 가족 이름을 영문으로 표기하는 정도지만 그 용기와 도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는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섬에서 학교에 가려면 배를 타고 큰 섬까지 가야 했다. 학교에 보낼 수 없었던 할머니는 엄마에게 한글과 간단한 셈법을 직접 가르쳤다. 할머니는 그 글을 할아버지 곁에 앉아 배웠다. 할아버지는 한글은 물론 천자문까지 할머니께 가르쳐주었다. 덕분에 할머니는 동네에서 박식한 사람이란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배운 엄마의 글은 바로 도움이 되었다. 손편지로 서로의 안부를 묻던 시절, 엄마는 동네 아낙들의 연애편지를 대필해주었다. 군대에 간 남편의 편지를 들고 오면 엄마는 그 내용을 읽어주고 답장까지 써주었다고 한다. “니는 어찌 그리 내 맘을 잘 알고 하고 싶은 말을 잘도 썼냐. 맘에 쏙 든다 야.” 엄마도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아빠를 군대에 보내야 했다. 그래서 누구보다 그 마음을 잘 알기에 편지의 내용이 더 절절하지 않았을까.

긴 겨울 밤 엄마의 입담이 더해진 옛날이야기는 몇 번을 들어도 재미있었다. 무서운 귀신 이야기를 들을 때면 엄마 품으로 파고들었고 ‘콩쥐팥쥐’의 주인공처럼 슬픈 이야기는 눈물을 흘리면서 들었다. 이야기 하나가 끝날 때마다 동생과 나는 더, 더, 하나만 더 하고 졸라 댔다. 하늘에 달과 별도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시간, 초롱불만 문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밤을 지키고 있었다.

학교에 들어가 글을 배우고 동화책을 읽게 되면서 놀랐다. 엄마가 들려주던 많은 이야기가 책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은 엄마가 지어낸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이야기가 동화책에 그대로 있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엄마가 책을 참 많이 읽었다고 생각했다. 엄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글로 읽는 것이 얼마나 흥미로웠던지. 아마 그때부터 책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엄마는 책 읽을 때 자못 진지했다. 왜 그동안 엄마가 책을 좋아한다는 생각을 못했을까. 월간 문학지 구독을 신청하려는데 엄마가 생각났다. 매달 책을 받아보는 기쁨을 엄마에게 주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 이름으로도 신청했다. 엄마와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글을 통해 오고 갈 엄마와 대화가 기대된다. 누가 알겠는가. 젊은 날의 실력이 되살아나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남기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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