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유세진] 다시 다닌 학교

유세진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다시 다닌 학교

 

학교 앞 도로가 꽉 막혔다. 서둘러 집을 나섰건만 시작종이 울리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아이들을 떨궜다. 혹시나 지각으로 체크될까 봐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빨리 뛰어 들어가. 딸과 아들은 듣는 둥 마는 둥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운전대를 부여잡은 손아귀와 조이던 심장이 스르르 풀렸다. 줄줄이 정체된 앞차들을 보아하니 밖으로 빠져나가기도 만만치 않겠다. 급할 게 없으니 한쪽 손을 팔걸이에 걸치고 학교 주변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그런데 번득 밀려드는 이 낯선 기분은 뭘까. 분명 종소리를 들었는데 뛰는 학생들이 하나도 없다니!

 

지각이다.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교문까지 전력 질주를 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늑장 부리면 쇠창살 교문이 철커덩 닫히고 그 앞에서 몽둥이를 들고 서 있는 학주쌤을 맞닥뜨리고 만다. 만원 버스 안에서 이미 진을 다 뺐는데 학교까지 뛸 힘이 남아 있을까. 오늘따라 교복 치마가 정전기를 일며 걸리적거린다. 가방도 왜 이렇게 무거운지. 뛸 때마다 도시락 가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 반찬 국물 새는 거 정말 싫은데... 가방 열어보기가 무섭다.

   간신히 교문을 통과하고 교실 책상에 털썩 앉았다. 창문 너머 지각생들이 손을 들고 쪼그려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학주가 막대기를 손바닥에 내리치며 학생들을 겁준다. 저들 사이에 있었다면 오늘 하루는 완전 공치는 거다. 공부할 게 산더미인데 이미 컨디션은 엉망이다. 야자까지 어떻게 버티나. 언제까지 이렇게 헉헉대며 살아야 할까. 다른 세상으로 멀리 도망치고 싶다. 

 

빡빡했던 나의 학창 시절 기억을 밀쳐내고 달라도 너무 다른 아이들 학교로 다시 돌아왔다. 노란 완장을 찬 학생주임 대신 짙은 남색 제복을 입은 경찰이 문 앞에 서 있다. 빨간 머리에 화장하고 배꼽 보이는 옷을 입었다고 고등학생들을 선도하는 일은 절대 없다. 하루가 멀다하고 들어오는 협박 신고로 학교 안전을 살피기만도 바쁘다. 시작종이 울리면 외부 위협으로부터 보호를 위해 문을 닫지만 벨만 누르면 문은 바로 열린다. 지각생을 나무라는 건 알림 쪽지뿐이다. 무장경찰은 있어도 어디에도 인상 쓰는 선생과 체벌 같은 강압은 없다.

게다가 책상에만 앉아 있다 별 보고 하교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수업은 3시도 안 돼 끝나고, 아이들은 방과 후 경험을 쌓으려 일터로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간다. 그것도 자기가 직접 운전을 해서 말이다. 감옥 속 죄수 같은 기분으로 삼시세끼를 학교에서 먹던 나로서, 이 자유롭고 활기찬 분위기가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획일화된 교복도 두발 규제도 없고 진을 빼는 야간자율학습도 없는 여기가 별천지나 다름없다.

나라도 세대도 다른 걸 억지로 비교하나 싶었다. 하지만 첫째가 입시 원서를 쓰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또 떨궜다. 부러우면 지는 건데... 나는 선 지원 후 시험으로 당락을 결정했던 마지막 학력고사 세대다. 지원한 대학교 강의실도 낯설었건만 하필이면 난로 바로 뒷자리에 내 수험표가 있었다. 땀을 삐질 흘리며 노곤함을 간신히 참고 치른 시험이 영 찜찜했다. 아니나 다를까 전화기 너머 불합격 소식이 들려왔다. 거절감을 뼈저리게 맛본 그날 밤은 아직도 내 인생에 어두운 그늘로 남아있다. 한 번의 시험으로 12년간의 노력이 단번에 평가되는 운명이 참 팍팍하고 거칠었지만 차마 찍소리도 못 내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 후로 태평양을 건너 이국땅에서 두 자녀의 학부모가 됐다. 어린 둘째를 안고 큰애를 혼자 스쿨버스에 태워 보냈던 킨더 첫날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내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미국 학교를 첫째 아이를 통해 좌충우돌하며 같이 다녔다. 어느덧 막내도 공교육 마지막 학년인 시니어 이어를 지나고 있다. 졸업학점이 다 차서 1교시 수업을 뺄 수 있는 아들은 오늘도 느지막이 일어나 등교 준비를 한다. 엄마가 고3일 때는 말이지… 라고 잔소리 하고 싶지만 입을 꾹 다문다. 그 대신 아직도 나에겐 긴장이고 응어리인 학교가 준 상처를 살며시 보듬는다. 그렇게 오래 책상에 앉아 있어도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하고 싶은 게 뭔지조차 배우지 못했던 가여운 때를 위로하면서. 그저 대학이란 명패 따기에 급급해 벌벌 떨며 참았던 그때 그 생채기가 제법 다 아물어 간다.  

자녀와 함께 한 학교생활도 올해가 마지막이다. 알람 소리에 맞춰 일어나 도시락 싸는 것도, 아이 학교 스케줄에 맞춰 라이드 하는 일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나를 위해 도시락을 세 개씩이나 쌌던 엄마에 비하면 날로 먹은 학부모 시절이다. 그래서 남은 시간이라도 반찬 하나 더 챙기며 정성을 다하련다. 아이들 덕분에 다시 다닌 학교는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 빛나는 유종의 미 속으로 차츰 옮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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