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느린' 이스라엘 가자 지상작전…외교적 계산 마친 '절충안'

이란 "선 넘었다" 확전 경고…서방은 반전 시위로 몸살

팔레스타인 주민 피해 최소화…다국적 인질 230명도 보호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기습에 대한 보복으로 가자지구에 공습을 퍼부은 데 이어 지난 27일(현지시간)에는 지상 병력을 본격 투입했다. 그러나 육·해·공군이 한날한시에 침공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소규모 병력으로 지상전이 전개된 데다 진격 속도도 매우 느린 것으로 확인되면서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지상전 개시 나흘째를 맞은 30일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복수의 전문가들을 인용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이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며 이를 통해 "동맹국과 적들의 요구에 부합하게 됐다"고 보도했다. 이스라엘이 진격 속도를 의도적으로 늦춘 건 서방 동맹국은 물론 주변 중동국들에 대한 외교적 계산을 마친 일종의 '절충안'이란 분석이다.

◇이스라엘 자위권 지지한 서방…팔 사망자 폭증에 싸늘해진 자국 여론

먼저 이스라엘 동맹국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미국 등 서방은 지난 7일 하마스 기습 이후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로켓 공격과 하마스 대원들이 벌인 학살로 이스라엘에서 1400명이 사망한 만큼 지지 명분도 충분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연일 보복 공습을 가하면서 팔레스타인 측 사망자가 속출하자 서방 국내 여론이 조금씩 돌아서기 시작했다. 가자 보건당국이 발표한 누적 사망자수는 이날 기준 8300명을 넘어섰다. 이스라엘 측 인명피해의 여섯 배에 육박하는 규모다. 이중 어린이는 3324명이며 부상자는 모두 2만242명으로 집계됐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지상군 투입 예고로 팔레스타인 인명피해가 더욱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 나오자 뉴욕, 런던, 파리 등 서방 주요 도심에선 반전 시위가 거세게 일었다. 키어 스타머 영국 노동당 대표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광범위한 '정치적 반란'이 벌어졌다고 평가했을 정도다. 영국 노동당 원내 지도부 12명은 현재 휴전을 촉구하며 탈당한 상태다.

지난 27일 유엔 총회에선 이스라엘과 하마스간 인도주의적 휴전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찬성 120표·반대 4표·기권 45표로 통과됐다. 이스라엘의 자위권 행사를 옹호해 온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연합(EU) 8개국이 가결표를 행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비영리 단체 엘넷이스라엘의 엠마누엘 나본 전무이사는 프랑스가 결의안에 공개적으로 찬성한 건 이스라엘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내년 재선을 앞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상황 관리에 들어간 모습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29일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의 통화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하면서도 "가자지구 주민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인도적 지원을 크게 늘리라"고 말했다고 백악관은 전했다. 27일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바이든 정부는 이스라엘 측에 지상 공격 계획을 재고하라며 대신 표적 공습을 수행하는 '외과수술식(surgical) 작전'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란 지원' 헤즈볼라, 북부서 활개…전선 두개로 늘어나면 부담

지상전 확대로 전쟁이 중동 전역으로 번지는 건 이스라엘로서도 피하고 싶은 선택지다. 이란은 물론 미국과 가까운 사우디아라비아·이집트·요르단·아랍에미리트(UAE)는 전쟁이 벌어지자 일찌감치 팔레스타인 지지 입장을 표명한 상태다. 게다가 하마스는 지난 17일 가자지구 내 알 아흘리 병원 폭발사건을 계기로 더욱 강력한 중동국들의 지지를 받게 됐다.

물론 역내 확전 우려는 다소 과장돼 있다는 게 외교정책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같은 이슬람 신자인 팔레스타인 주민들에 대한 자국 내 동정 여론을 의식해 원론적 차원에서 지지 입장을 표명한 중동국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국교 수립을 물밑에서 추진해 왔던 사우디가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북부로 전선이 확장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 때문이다.

레바논을 근거지로 하는 이슬람 무장단체 헤즈볼라는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다음 날인 지난 8일 이들과 연대한다는 뜻을 밝힌 뒤 이스라엘 점령지인 골란고원 일대에 대규모 로켓과 박격포를 발사했다. 이후에도 이스라엘 북부 접경지 일대에서 산발적인 교전을 벌이고 있다. 29일에도 이스라엘을 향해 약 20발의 로켓을 발사해 민가를 파괴했다.

같은 날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도 가자지구에 대한 지상 작전을 확대해 나가는 이스라엘이 레드라인을 넘었다고 경고했다. 그는 "시온주의(유대인 민족주의) 정권의 범죄가 레드 라인을 넘어섰고, 모두가 행동에 나서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다만 이스라엘군 관계자는 헤즈볼라 공격과 관련해 이날 NYT와의 인터뷰에서 "충분히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 있으며 헤즈볼라 참전이 임박했음을 시사하지는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전면 침공' 대신 '슬라이스 지상전'…주민 피해 줄여 확전 빌미 차단

하마스 기습에 허를 찔린 이스라엘로선 하마스에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는 국내 여론이 워낙 강한 데다 이미 뱉어 놓은 말이 있기 때문에 가자지구 지상군 투입을 더는 미룰 수 없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주민 피해가 급증할 수록 동맹국들의 지지에 균열이 생기고 주변 중동국들의 결속이 강화되는 만큼 '전면 침공' 대신 느린 속도로 가자지구에 진입하는 방식으로 전술을 선회한 것으로 풀이된다.

싱크탱크 미국/중동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다니엘 레비 연구원은 이날 NYT와의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은 적을 시험하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며 "매우 느린 체스 게임이 오히려 빠르게 속도를 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당장은 답답해 보일 순 있어도 결과적으로 확전 빌미를 차단해 종전을 앞당길 수 있다는 얘기다.  

WP는 다수의 군사 전문가들을 인용해 이스라엘군이 1마일(1.6㎞) 단위가 아닌 100야드(91m)씩 진격하고 있다고 했다. 이른바 '점진적 접근법'(gradual approach)으로 대규모 시가전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민간인 피해를 줄이는 효과가 있다.

또한 총연장 500㎞로 추정되는 가자지구의 땅굴 곳곳에 매설된 부비트랩도 단계적으로 해체해 나갈 수 있다. 현재 땅굴에는 하마스에 피랍된 26개국 출신 다국적 인질 230여명이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BBC 방송은 가자지구 외곽의 교두보를 하나씩 확보해 나가면서 하마스를 봉쇄한다는 뜻에서 이스라엘군이 '슬라이스 전술'을 선보였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스라엘군이 느린 진격을 택한 만큼 하마스 해체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28일 "전쟁의 두번째 단계를 열었다. 우리의 살인적인 적을 파괴하겠다"면서 국민들에게 "길고 어려운 전쟁이 될 것"이라고 밝힌 배경이다. 이렇게 되면 당초 계획과 달리 팔레스타인 사상자 수 증가는 불가피해진다.

이날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가자지구 북부에 거주하는 주민 약 110만명에 이스라엘군이 사전 대피를 거듭 통보했지만 여전히 3분의 1이 삶의 터전을 지키고 있는 데다 구호품이 턱없이 부족한 탓에 팔레스타인 주민 피해는 계속 늘 것이라고 경고했다.

 

기사제공=뉴스1(시애틀N 제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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