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안문자] 책 속의 길을 걷는다
- 23-10-30
안문자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책 속의 길을 걷는다
책을 정리하던 손을 멈춘다. 아버지의 손길과 정신이 깃든 책들과 수첩들, 일기장, 원고뭉치들을 마주하고 있다. 아버지의 다정한 음성이 환청이듯 들리고, 어머니의 자애로운 모습이 떠올라 문득문득 목울대가 떨린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랜 후, 어머니마저 떠나신 후에야 형제들은 마음에 드는 책들을 나누어 가져갔다. 그러고도 아버지의 분신인 듯 아직도 살아 숨 쉬는 아버지가 쓴 책들과 귀한 자료들은 그대로 10여 년 넘게 간직하고 있다. 오래된 책들은 글씨가 깨알 같고 누렇게 바삭거리는 종이들은 만지면 부스러지는 책도 있다. 둘러앉은 우리는 아무 말도 않고 살살 먼지를 턴다. 훌쩍거리며 주저앉아 읽기도 한다. 아버지가 우리를 떠나신 지 20여 년이 지났건만 이런 감정을 다스리기 힘들어 미루었던 유품 정리다.
아버지는 아동문학가로, 교육자로 그리고 종교 지도자로 평생을 보내셨다. 그분은 만만치 않은 세월을 거치면서 80여 권의 책을 쓰셨다. 나라가 가난하고 피폐했던 시절, 아버지는 책을 말 없는 스승으로 삼고 책과 더불어 살면서 영혼을 살찌우고 삶의 지혜를 배우셨던 것 같다.
그래서 즐겨 읽으셨던 책이나, 마음을 쏟아 지은 책들은 남아있는 우리에게 함부로 처분할 수 없는 귀중품이 된 것이다. 그 때문에 아버지의 숨결이 깃들어 있고 정신이 살아있는 책들은 막냇동생이 간직해왔고 이제껏 차마 정리할 수 없었다. 그 책 속엔 희망이 있고, 웃음이 있고, 잊을 수 없는 옛 이야기가 있다.
몇십 년 간직해온 수첩들 속의 메모에는 아버지의 삶이 멋있는 글씨체와 함께 그대로 담겨 있다. 피난 올 때 갖고 온 가죽앨범에 누렇게 변한 부모님의 결혼사진과 할머니, 삼촌, 고모, 평양 동부교회의 사진도 있다.
이번에도 형제들 몇이 그 일로 모였건만 괜스레 이것저것 옛날이야기로 슬픔을 달랜다. 모두가 백발이 보기 좋게 머리를 덮었고 세월이 그냥 지나갈 수 없어 남긴 흔적들을 얼굴에서 보며 허공을 응시한다. 결국 우리는 아버지가 손수 쓰시고 출판했던 낡은 책들과 친필 원고인 설교, 시, 칼럼, 일기, 작은 수첩들과 사진들은 차마 버릴 수 없어 다시 책장에 남겼다. 다시 꽂히고 쌓인 물건들을 바라보던 막냇동생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엷은 미소만 짓고 있다.
나는 버려야 할 책들을 바라보며 절망감으로 슬퍼졌다, 나중엔 이렇게 되고 말 것을. 아버지는 얼마나 애지중지했었나. 그러나 아버지의 책들이 사라진다고 너무 절망하고 좌절하진 말자. 아버지의 책 사랑이 흐르는 세월과 함께 과거 속으로 사라지고 당대의 모든 것들이 역사 속으로 묻히고 말겠지만, 새로운 생명은 태어나고 자라 그들의 세상을 이어가듯 책들의 역사도 시대의 변천과 함께 뜻 깊게 이어지지 않겠는가. 애써 자신을 위로하며 희망을 품어본다.
아버지의 음성이 들린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만들어 놓은 것 중에 무엇보다 값지고 경이로운 것이 책이란다. 책속에 길이 있으니 많이 읽어라. 그래야 사람답게 살 수 있지. 문자 너는 글쓰기를 좋아하지? 그러니까 책을 읽지 않으면 글을 쓸 수 가 없단다. 무조건 많이 읽어라. 어디 요즘에 쓴 글 한 번 읽어 보아라.”
누군가 말했다. ‘세상에 책들은 자갈처럼 흔하다.’고. 그 자갈 속에서 보석을 찾아야 자신을 보다 깊게 만든다고 했다. 아버지의 영혼을 맑게 하고 삶의 의미와 기쁨을 주었던 책들은 삭아 없어져 버리겠지만 세상에 이어질 책들은 계속되고 그 힘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원동력이며 미래를 밝혀준다는 아버지의 책사랑 교육은 우리마음에 스며있고 정신에 각인되어 있다. 책 속에 길이 있고 그 길이 바람직한 미래로 향할 때 책은 그 몫을 다하는 것이리라.
나는 오늘도 책 속의 길을 걸으며 정성을 다해 서투른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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