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생활-김 준 장로] 피보다 진한 것
- 23-09-25
김 준 장로(종교 칼럼니스트)
피보다 진한 것
동양 문화에서는 헐육의 정을 강조하면서 부모 자식간이나 형제 자매간은 진한 피와 같은 끈끈한 관계이고 부부간의 관계는 진하지 않는 물과 같은 관계로 보았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서울의 어느 고등학교 교장으로 봉직하다가 은퇴한 분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인 그 부부는 노년기에 더욱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매일 새벽 기도회에도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심한 폭우 때문에 기도회에 갈 수가 없어 남편은 잠자리에 누워있었고 부인은 침실 한쪽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부인의 기도 소리가 늦잠을 청하는 남편의 귓전에 어렴풋이 들려왔습니다. 그가 자세히 들어보니 부인은 이런 기도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 .하나님, 우리 영감 먼저 데려가시고 그 후에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영감을 꼭 먼저 데려가시고 그 후에 저를 데려가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잠을 자고 있는 듯한 남편을 의식조차 하지 않고 열심히 드리는 부인의 기도 소리를 들은 남편은 눈이 둥그래졌습니다. ‘아니, 나를 먼저 데려가라니… 날 보고 먼저 죽으라고?’ 그는 속으로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기도를 드리는 부인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어 잠자는 체 하면서 참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부인이 조반을 준비해놓고 남편을 불렀습니다.
식탁에 나와 앉은 남편은 불편한 심기를 참으며 말없이 식사를 하다가 드디어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습니다.
“그래, 나 먼저 데려가라고 기도하던데… 내가 먼저 죽고 나면 당신이 뭐 연애를 할거요, 아니면 새 영감을 맞을거요, 왜 날 먼저 데려가라고 하는거요?”
“들었수?”
“그럼 들었지, 내 귀가 아직 밝은데 못들었을라구!”
부인은 들고 있던 찻잔을 식탁 위에 놓고는 한 숨을 길게 내쉬고 나서 말했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 드릴까요?”
대답이 없는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부인이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내 주위 여러 가정들을 보았는데요. 남편이 먼저가고 부인이 남으면 그 부인은 그런대로 음식도 만들어먹고, 빨래도 해입고, 자녀들의 집에 가서 애기도 봐주면서 살아가는데, 부인이 먼저 가고 나면 홀로 남은 남편은 그 외로움과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더라구요. 음식을 제대로 챙겨 먹기를 하나, 옷을 제대로 빨아 입기를 하나, 자녀들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으니 찾아갈 면목도 없고… 남자가 홀로 사는 모습은 왜 그렇게 더 힘들어 보이고 처량해보이고 불쌍해보이는지…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 앞에서 당신을 먼저 데려가 달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오는군요…”
그 부인의 “영감 먼저 데려가주소소”하는 그 기도 속에 담긴 사랑의 농도가 피보다 더 진하면 진했지 어찌 피보다 묽은 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는 피냐 물이냐, 내 혈육이냐 아니냐를 가릴 필요가 없고 따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류의 한 아버지로 믿고 섬기고 있는 한, 그리고 모든 인류를 하나님의 자녀로 믿고 인정하는 한, 우리에게는 오직 모든 이웃을 향한 지극한 인간애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예수님의 가족만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예수님이 언제 예수님의 동족만을 위해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인간을 사랑하며 인간애를 위하여 헌신했던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이 언제 물이냐 피냐를 따지고 구별하면서 목숨을 바쳤습니까.
공자님은 부모와 자녀, 형제 자매 등 혈육의 관계를 하늘이 맺어진 천륜의 관계라고 가르치면서 특별한 인애의 관계임을 강조하셨지만 예수님은 부부간의 사랑만을 강조하시지도 않았고 혈육간의 사랑만을 강조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이웃 사람’을 역설하셨고 그 이웃은 물이나 피를 초월한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웃 사람’을 확대시켜 나아갈때 그 사랑은 인류애로까지 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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