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염미숙] 클레어의 창
- 23-09-17
염미숙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클레어의 창
동네 한 바퀴를 돌 때마다 그 집 옆을 지난다. 몇 해 전 새로 단장한 그 집엔 나무담장으로 두른 뒷마당이 있다. 어느 날 그 담장에 구멍이 났다. 반듯한 네모 창이라 무슨 용도인지 궁금했다. 몇 날이 지나고 창 위쪽에 ‘클레어’라는 이름표가 붙었다. 그리고 얼마 뒤 마침내 주인공이 등장했다. 눈매가 순한 포인터 한 마리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두리번거리더니 내게 말을 걸듯 멍멍 짖었다.
집은 삼거리에 있어 클레어는 숲을 낀 산책길을 따라 걸어 올라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오래 바라볼 수 있다. 창의 양옆 방향에서도 유모차를 미는 아기 엄마나 녀석이 유난히 반기는 반려견들도 나타나니 심심치 않을 것이다. 나는 숲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그 창에 눈도장을 찍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집으로 돌아오곤 한다.
클레어가 지루하지 않기를 바라는 주인의 배려겠지만, 그 창에 자꾸 눈길이 머무는 건 나뿐만이 아니다. 지나는 이웃들도 나처럼 그 창을 기웃거린다. 이름표로 인해 이웃들도 녀석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존재의 시작이라 했던가.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는 건 관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담은 가족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세워졌지만, 창의 크기 정도라도 이웃에 대한 호의를 표현한 건 아닐까 생각하니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다. 각자 삶을 살아내려 분투하는 조용한 마을, 클레어의 창에서 모처럼 살아있는 것들의 온기를 느낀다.
어느 날 숲길을 걸어 올라와 창을 바라보다가 또 다른 클레어가 구멍으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오래전 캐나다 어학연수 중 만난 반려견의 이름도 클레어였다. 현지인의 집에서 2박 3일간 홈스테이를 했다. 집주인 앤은 클레어라는 이름의 골든레트리버와 단둘이 살았다. 둘만의 삶이 적적했던지 나는 첫날부터 클레어의 격한 환영을 받았다. 녀석은 입꼬리를 올리고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다음 날 아침 방문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잠에서 깼다. 문을 빠끔히 열고 내다보았다. 클레어가 방문 앞을 지나가는 척하다가 갑자기 문 앞에서 펄쩍 뛰어오르더니 육중한 제 몸을 바닥에 쿵 하고 던졌다. 문을 열고 나가니 신나서 달려들었다. 앤이 웃으며 일렀다. 내 방문을 자꾸 건드려서 주의를 줬더니 문 앞에서 자꾸 점프했다고. 녀석은 무례하지 않은 방법으로 손님을 깨우려고 머리를 썼고 효과는 만점이었다.
앤과 클레어가 매일 걷는 코스를 따라 산책을 나섰다. 클레어는 예의 바르게 앤과 보조를 맞추며 걸었다. 녀석은 동네 사정을 다 꿰고 있었다. 사나운 개가 사는 집 앞에선 긴장하며 녀석답지 않게 으르렁대고 어느 집에 이르자 아예 자기 집처럼 유유히 현관문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쌍둥이 여자아이들이 반기며 나와 녀석을 쓰다듬었다. 다음 집 앞에선 이층 창을 바라보며 누구를 부르듯 짖었다. 몸이 불편해 보이는 어르신 한 분이 손을 흔들어 주니 그제야 꼬리를 힘차게 흔들었다.
오랜 세월 싱글로 살아온 앤이 클레어를 통해 이웃과 소통하던 모습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언젠가 반려견을 키우게 된다면 그 이름은 클레어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종종 사람 사이의 불통으로 신음하는 나로서는 클레어식의 소통이 부럽기도 하다. 매번 상대를 호의로 대하는 바보스러움. 상대를 아프게 하지 않으려고 힘을 다 쓰지 않는 부드러움. 적대감이 가득한 세상에서 사나운 타인과 나에게 놀라는 날에는, 바보가 되기는 싫으면서도, 누군가 이런 몽매함으로 나를 바라봐 주길 바라는 이기적인 꿈을 꾸기도 한다.
깜짝 해가 나온 틈에 골목으로 들어섰다. 클레어의 창 앞에 두 여인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그들 사이에 귀를 펄럭이며 클레어가 끼어든다. 창에서 새어나온 바람이 사람과 사람을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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