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박보라] 아담스 패밀리
- 23-08-21
박보라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터주지부 회원)
아담스 패밀리
누군가의 가족사진을 보고 있다. 사진 속 아버지는 아이들과 함께 요리하고, 집안 곳곳을 고친다. 어머니는 아이들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쓰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활짝 웃고 있다. 그 뒤로 온가족이 함께한 여행지 사진이 줄을 선다.
갑자기 내 감정의 일부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닥 저 아래로 단숨에 가라앉는다. 제대로 마름질하지 않은 옛 기억이 꺼끌거리며 마찰음을 낸다. 이 생소한 느낌은 더듬이를 잃은 곤충처럼 제자리를 빙글빙글 돈다. 그리고 곧이어 이 감정의 정중앙에 도달하자 굵은 눈물방울 하나가 뚝 떨어진다.
딸아이가 친구네를 다녀와서 말했다. 엄마, 우리 가족은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아. 난 그 말에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우리 부부는 크게 싸워 본 적도 없고, 아이들은 서로 잘 지내지 않았던가. 그뿐이랴. 아이들에게 부모의 욕심을 강요하기보단 그들의 재능을 살려주고, 꿈을 응원해 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행복하지 않다고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딸아이가 몇 가지 이유를 덧붙였다. 우리 가족은 패밀리타임을 자주 갖지 않았고, 여행도 잘 가지 않았잖아. 그 말을 들은 난 무슨 말을 내뱉으려다 멈췄다. 그건 변명이 될 게 분명했다. 아빠가 사업을 하니까 바빠서 그랬지, 너희들 중요한 스케줄이 늘 꽉 차 있었으니까 그랬지, 우린 사람이 많아서 한번 움직이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드니까 그랬지. 그런 말들이 내 머릿속을 돌아 입까지 왔을 때, 드디어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던 생소한 느낌이 불을 켜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다들 그러고 살아요, 이민 생활이 다 어려운 거 아니겠어요? 주변인들의 말에 위안을 삼았다. 그것이 내 죄책감을 생쥐처럼 갉아 먹었다. 남은 부스러기는 발로 쓱쓱 쓸어 잘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치워버렸다. 그러고선 나 혼자 행복한 가족사진을 벽에 걸고 만족스럽게 샴페인 잔을 높이 들었다. 톡 쏘는 샴페인의 뒷맛이 꺼끌거리는 옛 기억을 목구멍으로 역류시켰다.
난 늘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가 반겨주길 바랐어. 이제 막 어른이 된 나는 오랫동안 숨겨왔던 마음을 토해냈다. 그러자 엄마는 한숨과 함께 변명을 쏟아냈다. 그땐 다 그러고 살았어. 너 과외라도 하나 더 시키려면 엄마도 일해야 했고. 갑자기 내 감정의 일부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닥 저 아래로 단숨에 가라앉았다. 그리고 곧이어 이 감정의 정중앙에 도달하자 굵은 눈물방울 하나가 뚝 떨어졌다. 난 그냥 엄마가 집에서 날 기다려 주길 바랐을 뿐이야. 비 오는 날 다른 엄마들처럼 우산을 가지고 학교로 찾아와 주길 바랐고.
학교 창문 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쓸데없는 기대가 비집고 올라왔다. 엄마가 일하러 간 시간이란 걸 알면서도 ‘혹시’라는 단어를 자꾸 입가에 붙였다. 수업을 마칠 시간이 가까워지면 벌써 우산을 든 엄마들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들어오는 게 보였다. 빗방울이 점점 더 굵어질수록 그보다 더 굵은 눈물방울이 세차게 내 안에서 사선으로 꽂혔다.
우산 안 가져왔으면 아줌마랑 같이 쓰고 갈래? 아뇨, 엄마가 곧 오실 거예요. 친구 엄마가 물을 때마다 난 무슨 자존심에서였는지 거짓말을 하곤 했다. 지금처럼 넉살이 좋았더라면 얼른 친구의 우산 속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을 텐데 그때의 난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이십 분을 걸어 집에 돌아오면 옷뿐 아니라 질컥거리는 운동화까지 모두 빨아야 했다.
시간이 지나며 그 서운한 마음 뒤로 나 역시 줄을 서고 있었다. 나 또한 여러 이유를 달아 내 아이들의 운동화를 빗물로 질컥거리게 만들고 말았다. 발로 쓱쓱 쓸어 잘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치워버린 죄책감 부스러기가 먼지와 뒤섞여 재채기를 일으켰다. 우리 가족은 행복해 보일 뿐, 사실은 행복하지 않았다.
우리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매주 토요일마다 패밀리타임을 가질까? 다 커버린 딸아이가 내 제안을 거절한다 해도 어쩔 수 없지만, 날카롭게 쏟아지는 죄책감 속에서 우산을 들고 딸아이 앞에 섰다. 그러자 딸아이가 소리쳤다. 그럼 이번주 토요일엔 뭐부터 할까? 쿠키 굽기? 아니면, 영화 보기? 난 얼른 답했다. 둘 다 하지 뭐.
집안에 고소한 쿠키 냄새가 가득 찼다. 모양은 예쁘지 않지만, 달콤한 쿠키를 입안에 오물거리며 좁은 소파에 모두 모여 앉았다. 딸아이가 직접 고른 오늘의 영화는 <아담스 패밀리>. 포스터 속, 그들은 가족이라고 하기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문제가 많은 가족 같아 보였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의 입가엔 그들로 인해 알 수 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결혼 20주년을 맞아 가족사진을 찍었다. 검은색 정장을 맞춰 입은 다섯 사람이 카메라 앞에 나란히 섰는데 딸아이가 우리 가족이 마치 <아담스 패밀리> 같다고 소리쳤다. 그 말에 모두 깔깔대며 웃었다. 그늘진 나무숲 사이로 한줄기 따사로운 햇살이 사진 속에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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