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문해성] 삼각관계

문해성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삼각관계


조심스럽게 이불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바로 어둠 속에서 물체 하나가 움직이더니 내 몸에 찰싹 붙인다. 잠이 든 줄 알았는데 침대에서 계속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듯 더 가까이 밀착해 오면서 나를 살살 흔든다. 안아달라는 신호다. 가만히 손을 그 가슴에 얹었다. 콩당콩당, 사랑의 박동 소리가 참 따뜻하다.

“다정한 커풀 잘 잤나요?” 

코코와 거실로 내려오는 것을 보며 남편이 건넨 아침 인사다. 둘이 몸을 딱 붙이고 자는 모습이 세상 다정한 연인이라고. 남편 기분을 생각해서 나는 녀석을 번쩍 안아 그에게 키스를 시킨다. 녀석은 눈치도 없이 소파에 앉자마자 내 무릎 위에 앉기를 고집한다. 엄마 커피 마시게 이리 와, 하며 남편이 잡아당긴다. 그럴수록 코코는 내 옆에 더 붙는다. 못 말리는 사랑꾼이다.

이쯤 되면 남편은 서운함을 넘어 질투심까지 생기는 것 같다. 코코가 원래 자기 자리를 다 빼앗았다고 투정을 부린다. 남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강아지에게 질투하다니. 사람이 나이가 들면 어린아이가 되어간다고 하던데 남편이 딱 그렇다.

코코도 안다. 집에서 자신이 사랑을 독차지하는 막내라는 것을. 녀석에게 귀여움은 가장 큰 무기다. 보고 있으면 너무 사랑스러워 뭐든 해주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하랴. 주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려도 가끔 내 눈을 피해 남편이 슬쩍 우리가 먹는 음식을 준다는 걸 안다. 애원하는 눈빛을 보고 있으면 거절할 수 없었다고. 그런데 예민한 장 탓에 다음날 어김없이 꾸르륵 꾸르륵 요동치는 소리가 숨길 수 없는 증거다. 속상한 마음에 애꿎은 남편에게 큰소리를 치지만 사실은 나도 공범이다.

어디를 가든 코코는 내 껌딱지다. 이런 코코의 마음을 얻으려고 남편은 여러 가지 구애 작전을 써보지만, 녀석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내가 혼자 외출이라도 하게 되면 기회를 놓칠세라 코코가 좋아하는 일들을 벌인다. 간식을 싸 들고 커피숍에도 가고 드라이브도 한다. 공원에 가서는 코코가 제일 좋아하는 공놀이도 하고 산책할 계획까지. 그런데 그 좋아하는 공놀이에도 관심은커녕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단다. 오직 나한테 가고 싶다는 눈빛만 보내고 있는 모습에 짝사랑의 서운함을 느꼈을 남편. 

“그래, 십 년간 매일 당신과 함께 있었으니 당연하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남편의 체념 같은 말이다. 

“그러면 당신은 십 년간의 사랑이 갑자기 변했으면 좋겠어? 코코가 당신을 좋아하는 것 알잖아.” 남편이 서운해하지 않았으면 해서 하는 말이었지만 살짝 미안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미국 땅에 와서 만난 코코는 특별했다. 남편이 퇴근할 때까지 유일하게 같이 시간을 보내고 말을 걸 수 있는 대상이었다. 외로운 나의 친구가 되어주고 영어 실습 파트너가 되어주기도 했다. 언제나 열심히 들어 주고 반응해 주었다. 그래서 지금도 세상에서 내 영어를 제일 잘 알아듣는 것은 코코라고 생각한다.

올해 들어서 나이 탓인지 코코가 빨리 잠자리에 드는 날이 많아졌다. 전에는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내가 침대에 갈 때까지 옆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일정한 시간이 되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일어선다. 남편이 코코를 독점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그러나 그것도 내가 침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야기다. 코코가 내 쪽으로 돌아눕는데 채 1초가 걸리지 않는다고. 남편의 응석 섞인 말이다. 누가 그 사랑을 말릴 수 있으랴.

코코를 키우기 전에는 강아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집안에 동물을 키운다는 게 귀찮은 일이라 생각해서 관심도 두지 않았다. 주위에서 강아지나 고양이 등 반려동물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도 건성으로 들었다. 강아지 호텔, 강아지 스파, 강아지 레스토랑 같은 광고를 보면서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코코의 부모가 되고부터는 많은 게 변했다. 지나가는 강아지를 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눈을 맞추고 이름이라도 불러주고 싶어진다. 코코와 함께 살면서부터 예전에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녀석의 눈높이에 맞추다 보면 풀 한 포기, 바람 한 점이 소중하고 고맙게 다가온다.

더불어 산다는 것이 이런 것이지 싶다. 세상에는 크고 강한 것만이 존재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에는 의미가 있다. 강아지는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래서 온몸으로 표현한다. 오늘도 코코는 내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눈으로 표정을 읽으며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기울이면서 내 말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눈에서도 사랑의 스파크가 별처럼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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