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이 에스더] 모으는 재미, 비우는 행복
- 23-07-24
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모으는 재미, 비우는 행복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저 엄청난 것을 무슨 수로 다 치울까. 너른 공간만 믿은 게 문제였다. 남들이 이사 가면서 주는 것까지 넙죽넙죽 받아놓은 어리석은 친절이라니. 누구든 언제라도 쓸 수 있을 것 같아 잠시 보관해 두기로 한 게 그만 이 지경이 되었다.
이사를 앞두고 버릴 것과 남길 것을 나누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쉬 버리지 못하는 성격 탓에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물건에 지나친 의미를 두지 않기로 굳게 다짐했다.
차고에 들어섰다. 물건들이 차고를 점령한 지가 언제였을까. 켜켜이 쌓인 먼지 속에 그간의 기억들이 촘촘하게 배어 있다. 탁구대 위에서 통통 튀며 오가던 탁구공 같은 하얀 웃음도, 노란 카약을 타고 물살을 헤쳐 나가던 아이들의 반짝이던 얼굴도 시간 속에 묻힌 지 오래다.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들이 마치 퇴역 선박의 부품 같다. 차고 안이 쓸쓸하다.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가 없다. 눈에 띄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버려야 할 것들을 해치웠다. 손과 발이 움직인 만큼 공간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트럭이 오가기를 여러 차례, 땀이 흐르고 숨이 차다. 잠시 쉴 겸 차고 한가운데 의자를 놓고 앉았다. 어, 우리 집에 이런 분위기가 있었나. 정자에 오른 듯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새롭다. 버리고 비워낸 자리가 널찍하다. 차고의 앞뒷문으로 바람이 부지런히 들락거린다. 시원한 맞바람에 파김치 된 몸이 살아나는 것 같다.
미국에 와서 처음엔 아파트에서 살았다. 여기저기서 얻거나 중고 가게에서 산 것들로 집안을 채웠다. 그러다가 몇 년 후 주택으로 이사를 하면서 허접한 것들을 치우고 새 살림살이를 장만했다. 발품을 팔아가며 집안을 채우는 게 재미있었다. 가구가 하나씩 들어올 때마다 집터가 든든히 다져지는 것 같았다. 뿌듯했다. 보이는 것에 마음이 많이 기울던 그땐 집 안팎을 잘 가꾸는 것이 마치 나의 존재감을 대신한다고 여겼던 것 같다. 한창 젊은 시절이었다.
이 집으로 이사 오던 날, 차고가 실내 운동장만큼이나 넓어 보였다. 내 마음의 공간이 그만큼 비좁았다는 의미일 테다. 한국을 떠나올 때의 경험으로 세간붙이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차고에 쌓인 물건을 보니 그도 아니었다. 도대체 마음이란 걸 믿을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가벼운 그릇에 자꾸 손이 가더니 어느 날 집 안에 있는 것들이 모두 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정리할 때가 되었다는 몸의 신호였다. 그런데도 미루기를 몇 해. 이제 와서 한꺼번에 해치우려니 땀이 비 오듯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한더위에 짠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입안에서 소금 맛이 돈다.
모으고 채우느라 땀을 많이 흘렸는데, 비우고 버리는데도 온몸에 땀이 흥건하다. 그런데 느낌이 다르다. 모을 때의 땀이 뜨거웠다면 비울 때의 땀은 시원하다. 마치 몸 안에 쌓여있던 독소가 배출된 듯 가볍고 개운하다. 거미줄을 걷어내고 먼지를 쓸어냈다. 차고가 훤하다. 쓸데없는 것을 참 많이도 지니고 살았다. 욕심이었다.
옷장을 정리하고 보니 버릴 게 한 짐이다.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양손에 들고 나가는데, 갑자기 ‘버린다’는 단어가 목에 걸린다. 치열했던 삶의 순간순간이 스며있는 것들을 쓰레기처럼 버리다니, 뒷맛이 씁쓸하고 너무 냉정하다. 비우거나 덜어낸다는 말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비운다는 말이 더 좋다. 덜어내기 보다는 모으고 채우기에 급급했던 젊은 날에도 ‘텅 빈 충만’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던 것처럼.
붙박이 같이 걸려 있던 그림 액자들을 떼어냈다. 벽에 난 못 자국을 메우고 페인트를 칠했다.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는 빈 벽이 오히려 넉넉하고 편안해 보인다. 아끼던 것들을 걷어낸 자리에 민낯의 말간 아름다움이 있다. 여백의 미는 동양화에만 있는 게 아니다.
간단하고 깔끔하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청소에 게으른 자의 구차한 방책이라고 해도 좋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최소한의 것만 남기기로 했다. 아깝다고, 재활용하겠다고 모아두었던 것들을 과감하게 덜어냈다. 하찮은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살았던 과거와 결별하는 마음으로. 집이든 마음이든 정리의 시작은 비우고 덜어내는 데서부터, 라는 말을 되새긴다.
드디어 마당 정리까지 마쳤다. 우리 집이 이렇게 깔끔해 보이기는 결혼 후 처음 있는 일이다. 짱짱한 7월 햇살이 지붕 위에서 미끄럼을 타고, 살랑바람은 초록 이파리들의 옆구리를 간질인다. 꽃바구니에 벌새 두 마리가 사이좋게 날아든다.
“모을 때는 재미있더니 비우고 나니 행복하네.”
“그러게요, 이런 기쁨도 있네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시애틀 뉴스/핫이슈
한인 뉴스
- 한국 스타트업 미국진출 위해 중진공·시애틀총영사관 협력
- 시애틀시 ‘6월4일 한국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의 날’로 지정
- 6월 정부납품 세미나 이번 주말 열린다
- 시애틀 한인, 워싱턴주 EOC 커미셔너로 활동
- “시애틀 한인 여러분, 유언장이나 상속 문제는 이렇게”
- 한인 꿈나무들 학예경연대회로 그림ㆍ글 실력 맘껏 발휘(+영상,화보)
- 페더럴웨이 통합한국학교도 장날행사로 여름방학들어가(+화보)
- 벨뷰통합한국학교 풍성하고 즐거운 종업식(+영상,화보)
- 시애틀통합한국학교 신나는 장날행사로 방학 들어가(+화보)
- U&T파이낸셜, 워싱턴주 한인여성부동산협회 세미나 성황
- 워싱턴주음악협회 올해 정기연주회 젊고 밝고 맑았다(+영상,화보)
- FWYSO 2만4,600여달러 장학기금 모았다
- [신앙과 생활-김 준 장로] 김철훈 목사 소고(小考-4)
- KORAFF 한인입양가족재단 한국문화축제 연다
- 타코마한국학교, 특별한 한국어 여름학교 캠프 연다
- KWA대한부인회 평생교육원 봄학기 수료식
- UW 한인 이수인교수 삼성호암상 받았다
- [하이킹 정보] 시애틀산우회 1일 토요정기산행
- [하이킹 정보] 워싱턴주 시애틀산악회 2박3일 캠핑
- [하이킹 정보] 워싱턴주 대한산악회 1일 토요산행
- <속보>아동성폭행 타코마 한인군인, 택시기사 살해혐의로도 기소돼
시애틀 뉴스
- 워싱턴주 학생들 아직까지 FAFSA 결과 통보 못받아 전전긍긍
- 워싱턴주 오늘부터 범죄용의차량 추격 다시 가능해져
- 오늘, 내일 시애틀지역 바닷물 올해들어 가장 많이 빠진다
- 워싱턴 주민 "도살업자가 엉뚱하게 우리집 애완돼지 죽였다"
- 시애틀지역 평균 집값 100만 달러 돌파했다
- UW 순위 다소 밀렸지만 세계 명문대 맞다
- "시애틀지역에서 저렴한 탁아소 어디 없을까요"
- 시애틀 말썽꾸러기 ‘벨타운 헬캣’ 운전자에 거액벌금 요구
- 미국 항공사 요금반환법 제정엔 시애틀 고교 영향도 컸다
- 시애틀 역사풍물인 길거리 시계 ‘부활’한다
- 워싱턴주 경제 미국서 최고로 좋다
- MS, 스웨덴 AI·클라우드 인프라에 2년간 32억 달러 투자한다
- 긱하버 퍼레이드행사서 급발진해 5명 부상(+영상)
뉴스포커스
- '김정숙 순방 기내식' 6292만원 중 4125만원 '운송·보관료'
- 아브레우 액트지오 고문 "포항 석유·가스 유망…전 세계 주목"
- 서울대병원이 쏘아올린 '집단휴진', 동네 의원까지 확산할까
- '첫 파업' 삼성 노조, 연가 투쟁 참여율 낮아…생산 차질 없을 듯
- 도종환 "못 참겠다, 이게 공식 초청장…호화 기내식? 50명이 같은 도시락"
- '울산판 전청조' 남성 5명 동시 교제하며 수십억원 뜯어
- 이재명·조국, 2시간 비공개 회동…'22대 국회 협력 방안' 모색
- '현충일 욱일기' 부산 의사, 결국 내렸다…성난 민심 '신상 공개' 돌진
- 페이커 이상혁 "돈·명예 한시적…선한 영향력 고민하고 실천하겠다"
- 美도 놀란 '필름형' 조현병치료제…CMG제약 “이번엔 FDA 벽 넘는다”
- 서울대병원 17일부터 전면 휴진…응급 제외한 외래·수술 중단
- "맘에 들지 모르지만 핸드백 장만"…최재영 카톡 내용 공개
- 전공의 사직서 받는 정부…의대생 '휴학계'도 받을까
- 탈북자 단체, 북한에 '임영웅 노래' 보냈다…전단 20만 장 살포
- 김정숙 인도행 동행 고민정 "나도 그 기내식 먹었다, 엄청났다 기억 없어…"
- 한일 국민소득 '절반→역전'까지 18년…1인당 GDP도 추월 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