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이 에스더] 모으는 재미, 비우는 행복

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모으는 재미, 비우는 행복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저 엄청난 것을 무슨 수로 다 치울까. 너른 공간만 믿은 게 문제였다. 남들이 이사 가면서 주는 것까지 넙죽넙죽 받아놓은 어리석은 친절이라니. 누구든 언제라도 쓸 수 있을 것 같아 잠시 보관해 두기로 한 게 그만 이 지경이 되었다. 

이사를 앞두고 버릴 것과 남길 것을 나누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쉬 버리지 못하는 성격 탓에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물건에 지나친 의미를 두지 않기로 굳게 다짐했다. 

차고에 들어섰다. 물건들이 차고를 점령한 지가 언제였을까. 켜켜이 쌓인 먼지 속에 그간의 기억들이 촘촘하게 배어 있다. 탁구대 위에서 통통 튀며 오가던 탁구공 같은 하얀 웃음도, 노란 카약을 타고 물살을 헤쳐 나가던 아이들의 반짝이던 얼굴도 시간 속에 묻힌 지 오래다.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들이 마치 퇴역 선박의 부품 같다. 차고 안이 쓸쓸하다.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가 없다. 눈에 띄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버려야 할 것들을 해치웠다. 손과 발이 움직인 만큼 공간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트럭이 오가기를 여러 차례, 땀이 흐르고 숨이 차다. 잠시 쉴 겸 차고 한가운데 의자를 놓고 앉았다. 어, 우리 집에 이런 분위기가 있었나. 정자에 오른 듯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새롭다. 버리고 비워낸 자리가 널찍하다. 차고의 앞뒷문으로 바람이 부지런히 들락거린다. 시원한 맞바람에 파김치 된 몸이 살아나는 것 같다. 

미국에 와서 처음엔 아파트에서 살았다. 여기저기서 얻거나 중고 가게에서 산 것들로 집안을 채웠다. 그러다가 몇 년 후 주택으로 이사를 하면서 허접한 것들을 치우고 새 살림살이를 장만했다. 발품을 팔아가며 집안을 채우는 게 재미있었다. 가구가 하나씩 들어올 때마다 집터가 든든히 다져지는 것 같았다. 뿌듯했다. 보이는 것에 마음이 많이 기울던 그땐 집 안팎을 잘 가꾸는 것이 마치 나의 존재감을 대신한다고 여겼던 것 같다. 한창 젊은 시절이었다. 

이 집으로 이사 오던 날, 차고가 실내 운동장만큼이나 넓어 보였다. 내 마음의 공간이 그만큼 비좁았다는 의미일 테다. 한국을 떠나올 때의 경험으로 세간붙이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차고에 쌓인 물건을 보니 그도 아니었다. 도대체 마음이란 걸 믿을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가벼운 그릇에 자꾸 손이 가더니 어느 날 집 안에 있는 것들이 모두 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정리할 때가 되었다는 몸의 신호였다. 그런데도 미루기를 몇 해. 이제 와서 한꺼번에 해치우려니 땀이 비 오듯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한더위에 짠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입안에서 소금 맛이 돈다. 

모으고 채우느라 땀을 많이 흘렸는데, 비우고 버리는데도 온몸에 땀이 흥건하다. 그런데 느낌이 다르다. 모을 때의 땀이 뜨거웠다면 비울 때의 땀은 시원하다. 마치 몸 안에 쌓여있던 독소가 배출된 듯 가볍고 개운하다. 거미줄을 걷어내고 먼지를 쓸어냈다. 차고가 훤하다. 쓸데없는 것을 참 많이도 지니고 살았다. 욕심이었다.

옷장을 정리하고 보니 버릴 게 한 짐이다.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양손에 들고 나가는데, 갑자기 ‘버린다’는 단어가 목에 걸린다. 치열했던 삶의 순간순간이 스며있는 것들을 쓰레기처럼 버리다니, 뒷맛이 씁쓸하고 너무 냉정하다. 비우거나 덜어낸다는 말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비운다는 말이 더 좋다. 덜어내기 보다는 모으고 채우기에 급급했던 젊은 날에도 ‘텅 빈 충만’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던 것처럼. 

붙박이 같이 걸려 있던 그림 액자들을 떼어냈다. 벽에 난 못 자국을 메우고 페인트를 칠했다.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는 빈 벽이 오히려 넉넉하고 편안해 보인다. 아끼던 것들을 걷어낸 자리에 민낯의 말간 아름다움이 있다. 여백의 미는 동양화에만 있는 게 아니다.

간단하고 깔끔하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청소에 게으른 자의 구차한 방책이라고 해도 좋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최소한의 것만 남기기로 했다. 아깝다고, 재활용하겠다고 모아두었던 것들을 과감하게 덜어냈다. 하찮은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살았던 과거와 결별하는 마음으로. 집이든 마음이든 정리의 시작은 비우고 덜어내는 데서부터, 라는 말을 되새긴다. 

드디어 마당 정리까지 마쳤다. 우리 집이 이렇게 깔끔해 보이기는 결혼 후 처음 있는 일이다. 짱짱한 7월 햇살이 지붕 위에서 미끄럼을 타고, 살랑바람은 초록 이파리들의 옆구리를 간질인다. 꽃바구니에 벌새 두 마리가 사이좋게 날아든다. 

“모을 때는 재미있더니 비우고 나니 행복하네.” 

“그러게요, 이런 기쁨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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