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윤영목] 6ㆍ25 정전협정 70주년에 즈음해

윤영목(서북미 6ㆍ25참전국가유공자회 회장)


6ㆍ25 정전협정 70주년에 즈음해

 

3년1개월에 걸쳐 처참했던 6ㆍ25전쟁도 쌍방의 투지와 지구력(持久力)이 소진된듯 1953년 7월27일 드디어 정전협정이 채결됐다. 이후 장장 70년이란 긴세월이 흘러갔다. 아마도 세계 역사상 정전상태가 70년을 끌어온 것은 기네스북에 등재될 만한 신기록이 아닌가 싶다. 

수백만 인명과 막대한 재산피해를 내고서도 승패없이 원점으로 귀착한 무모한 전쟁이었다. 승산없는 전쟁은 시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격언을 되새시고 명심할 때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긴박했던 7월27일을 전후해 강원도 중동부에서 벌어진 전투상황을 소개하고자 한다.

1953년 7월 포병 제78대대 작전 참모로 화천저수지 북방에서 2군단 예하부대의 지원사격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름없는 벌판에 포진지를 구축하고 전방 보병부대를 주야로 지원하고 있었다. 7월20일경 전방부대에 파견된 관측장교로부터 다급한 통보가 왔다. 중공군의 인해전술 대공세로 아군 전선이 와해돼 더이상 관측 임무수행이 불가능하니 철수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포사격 지원도 중단되고 상급부대 지령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마저 산악지형으로 무선교신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대대장이 급기야 상급부대인 제1포병단 지휘소를 찾기 위해 부대를 떠나고 부대는 대기상태에 있었는데 전방에서 후퇴하는 기진맥진한 보병장병들이 계속 밀려 내려오면서 이구동성으로 중공군의 대공세로 국군 방위선이 붕괴돼 후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방 보병부대 방어없이 포병부대가 활동할수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손자병법을 십분 활용하고 후방 침투와 포위작전에 능숙한 중공군이 언제 어디에서 출몰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서 더이상 현위치에서 무작정 대기하고 있을 수 없었다. 대대장과도 무선 통신이 두절되자 필자는 긴급 참모회의를 개최해 후방 이동을 결정했다.

출동 준비가 완료되고 부대는 105mm 곡사포 18문을 이끌고 화천저수지 방향 남쪽으로 약 30분 이동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상급부대 포병단장과 미 고문관이 나타나 선두에 선 필자 차를 가로막고 다짜고짜 권총을 필자 가슴에 들어대고 “명령없이 어디로 가느냐”고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순간 아찔한 충격을 느꼈으나 침착한 자세로 상황 설명을 하고 “전선이 붕괴되고 상급 포병단뿐 아니라 대대장마저 연락이 두절된 고립상태에서 위험한 그 자리에 머물고 있으란 말이냐”고 오히려 따져물었다. 그제서야 지도상에 새로운 포진지를 지정받고 그곳에서 적진지 교란사격 임무를 수행했다. 그후 얼마가 지난 7월27일 휴전일을 맞이했다.

27일이 되자 그동안 주야로 쉴새없이 들려오던 포성이 일제히 멈춰지고 벌레소리 하나 들리지않았다. 지구 종말의 고요한 세상을 눈앞에 보게된 듯 그때의 너무나 섬득하고 신기한 느낌은 아직도 필자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후일 이 전투는 전쟁말기 중공군이 금성 돌출부 탈환을 위한 국군 제2군단 전선 일대에 감행한 대대적인 공세인 ‘금성전투’로 알려지고 있으며 중공군의 탈환작전이 성공리에 끝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쌍방에 막대한 인명 피해가 있었으며 수천명의 국군 포로/실종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정전 후 포로교환 당시 일부만 남한으로 송환되고 잔여 상당수가 북한에 억류되었다는 보도를 봤다. 2020년 중국은 이 전투를 배경으로 한 그들의 승리를 자축하는 ‘금강천’이란 선전영화를 제작했고 한국 영화사가 이 영화를 수입 했으나 상영반대 여론에 부딛쳐 개봉이 중단된 것으로 알고 있다. 

정전 후 수일이 지난 후 부대는 화천에서 양구지역으로 이동했다. 양구군 동북방 ‘펀치볼’지역 전선 정리작업이란 새로운 임무를 받고 펀치볼 지역의 각종 패기물 수습이 목적이었다. 펀치볼은 초대형 사발모양 분지로 6ㆍ25 격전지이기도 하며 그 넓은 분지 속에 민가가 이곳 저곳에 산재해 있었다. 

하루는 부대 병사 하나가 가까운 민가 뒷마당의 배나무에 올라가다 그곳에 부착된 대인 지뢰를 건드려 폭발과 동시에 즉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휴전협정이 체결된지 몇일 되지않는 그 시점에 너무나 안타깝고 불행한 사건이 아닐수 없었다. 70년이 지난 오늘 날 펀치볼은 양구군 해안면으로 휴전선 관광지로 변모되고 있는 듯하다.  

필자부대는 이곳 펀치볼에서 너무나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그것은 이 방대한 분지전체를 빈틈없이 메우도록 피어있는 아름다운 코스모스 꽃이었다. 전쟁 중 인적이 끊기고 그 포화속에서도 생명을 유지하면서 번식한 코스모스가 그 분지 속에서 꽃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그 광경이 필자의 머리 속에서 잊혀지지 않아 지은 시 한편을 나라위해 목숨 바친 호국영령에게 바친다. 그때 그 코스모스 꽃이 지금도 피고 있는지 한번 다시 가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나 이미 때가 늦은 감이 있어 아쉽다.


<휴전선의 코스모스>


1. 6ㆍ25의 포성이 멈치던 그날

   휴전선의 들판에 피어난 꽃은

   가냘프고 어여쁜 코스모스꽃 

   쓰러진 용사들의 미소였든가

   그 꽃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소


2. 인적없는 벌판의 코스모스는 

   그 누구를 위하여 피어났을까

   휴전을 축하하는 꽃이 아니면

   영혼을 위로하는 헌화였든가

    그 꽃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소


3. 휴전선에 피어난 코스모스는

   평화를 상징하는 꽃이였겠지

   남북의 온겨레가 바라는 염원

   통일의 밑거름과 씨앗이 되는 

   그꽃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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