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안문자] 숲에서 되새기는 <카라마조프 형제들>

안문자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숲에서 되새기는 <카라마조프 형제들>


오월에 피어나던 꽃들의 향연에 유월의 연초록 숲이 물결친다. 

말씀으로 지어진 세상의 만물은 오늘도 새롭다. 뜰에 서서 향긋한 공기를 흠뻑 들이켠다. 유월의 숲은 가지들이 끊임없이 밀어 올리는 수액으로 풋풋하고 싱그럽다. 

내 마음 안에도 아늑한 숲이 있다. 결혼 40여 년 만에 얻은 아주 작은 나의 서재! 메말라 흐려진 정신을 어루만져주고 정결케 하는 작은 숲. 꽂혀있는 책들은 맑은 샘물이 되어 메마른 마음을 촉촉이 적셔준다. 컴퓨터는 말하고 프린터는 화답한다. 책 읽고, 글 쓰는 나의 작은 방. 삶의 기쁨이 넘실거리는 숲은 날이 갈수록 푸르다. 중앙에는 성경책이 있고 훌륭한 분들의 책에는 신학, 철학, 예술, 문학이 살아 숨 쉬는 책들이 있다. 손을 뻗으면 문우들의 시집과 수필집이 잡힌다. 추억이 담긴 앨범도 있구나. 아, 우리의 젊음이, 중년이, 노년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방. 그리운 부모님의 사랑이, 평생의 행복인 내 가족과 형제와의 역사도, 새로 태어나 자라는 손자들의 사진도 벽에 가득 걸려 나를 보고 웃고 있는 축복의 숲! 

이 작은 방의 책들은 서로 사랑하며 감사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인생의 행복을 느끼는 지혜도 알려 준다. 우리의 삶 속에서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중요 한 것도 묻고 답해 준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을 여는 방법, 칭찬하고 용서하고 위로하는 사람이 되라고 이끌어 준다. 정신과 생각이 얼룩지지 않으려면, 감수성이 녹슬지 않으려면 나를 읽으라고 책꽂이의 책들이 조용히 속삭여 주기도 한다. 이미 읽은 책을 다시 펴든다. 언제 읽었지? 마지막 페이지에 적혀있는 읽은 해와 날짜를 확인한다. 무슨 내용이었나? 생각이 안 난다. 그러나 밑줄 친 문장에서 희미하게 기억이 되살아난다. 아, 그렇지. 다시 읽어야겠구나. 그래서 책들은 버릴 수 없어. 어떻게 이 귀중한 진리를 정리한단 말인가? 

고도원의 아침편지에 <책을 읽는 사람들>이란 메모가 있다. "책을 읽는 즐거움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오호라' 하며 마음속에서 놀라운 탄성을 지를 수 있게 하는 한 구절을 만났을 때의 기쁨이 가장 크지 않을까?" 라고. 밑줄을 그어 놓은 걸 되새김질 하며 ‘오호라’ 나도 솟구치는 환희를 경험한다. 

문득 생각난다. <카라마조프 형제들>이. 이 순간 왜 그 책이 떠올랐을까? 대학생 때 읽었던 책이다. 러시아의 위대한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작품이지 아마. 러시아인들의 고뇌와 애환을 그린 소설. 세상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내용으로 기억 되는데.....맨 마지막 장면에선 눈물 나는 감동으로 소름이 돋았다. 그 옛날, 이 책을 읽은 감격이 가시지 않았을 때, M 교수님께서 느닷없이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마지막 장면을 이야기 하셨지. 그분은 지금 잘 계실까? 교수님이 느꼈던 감동이 그대로 공감되어 와 혼자 전율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다시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서울에 있는 친구 S의 카톡을 받는다. 나는 염치없이 받기만 한다. 아름다운 시, 꽃, 감동스러운 동영상, 음악연주, 유명 화가의 그림들. 하여, 우리는 같은 하늘밑에 사는 것 같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다시 읽고 싶다고, 책을 다시 사야 하나? 그녀에게 말했다. 어? 이게 웬일인가? 며칠 후 비행기로 책이 왔다. 내 이야기를 듣고 그녀는 당장 <교문사>로 달려간 모양이다. 나는 너무 기뻐서 두 권의 책을 안고 눈물이 핑 돌았다. 와~이토록 방대 했던가? 1,2 권 합쳐 무려 1,175 페이지라니. 송료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책 읽는 친구, 청순했던 시절에 YWCA에서 만나 오늘까지 그리워하며 마음이 통하는 평생의 친구는 이름도 신선한 “신 선!” 고마운 그 친구는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을까? 

나는 그 옛날, 읽기를 마감하며 조금 울었던 이 책의 마지막 장면이 급해 먼저 읽어본다. 죄 많은 이 세상을 끝없이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묘사한 아름다운 결론을. 젊은 시절의 감동이 다시 살아나듯 친구의 이름처럼 신선한 숲의 향기를 마시며 가슴이 뻐근해 온다. 영혼과 인간성을 파헤친 책, 사람들의 내면에서 싸우는 선과 악을 통해서 인간과 신 사이를 연결해주는 위대한 이 대하드라마는 무디어가던 나의 정신에 새로운 활력을 부어 줄 것이다. 

차 한잔을 들고 남편이 들어온다. 늘 하던 대로 찻잔을 책상에 놓고 슬그머니 내 책장을 바라보다가 이 책 저 책을 뽑아 살핀다. 방주인, ‘돈 내고 빌려가세요.’ 손님, ‘이층으로 올라와요, 내 책과 바꾸어 봅시다. 뭐.’ 핫하하하, 그가 크게 웃는다. 책을 사랑하는 남편도 역시 40여 년 만에 자기 방을 차지했다. 남편과 아내는 각각 자신의 숲을 따로 가꾸고 있어 행복하다. 자정이 넘은 고요한 이 밤에 실없는 대화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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