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유세진] 본성과의 조우

유세진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본성과의 조우


봄기운이 완연해선가. 눈이 오고 비가 내려도 반려견과 어김없이 나서던 산책인데, 그날따라 꽤 설렜다.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듯 산뜻했고, 마음은 풍선을 품은 듯 둥실 떠 있었다. 무심코 지나치던 나무 하나에 들뜬 시선이 머물더니 온 신경이 그 속으로 빠져들었다. 언제 꽃이 지고 새잎이 돋았을까아아… 악! 한순간에 감미로운 감상이 산산조각 났다.

가벼운 마음만큼 줄을 잡은 손아귀 힘도 느슨해졌나 보다. 지나가는 개를 보고 우리 집 강아지가 흥분해 달려 나가는 것을 미처 제어하지 못했다. 순식간 목줄에 발이 엉겼고, 나는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꽈당하고 넘어지는 순간, 직감했다. 낭만이고 갬성이고 현실을 직시할 타임, 현타가 왔다는 것을. 길어지는 우기에 근력은 약해지고 정신 줄 또한 많이 헐거워졌다.

쓰라린 턱과 손등에서 피가 보이고 무릎은 욱신대는데, 다른 생각은 하나 들지 않았다. 오로지 이 자리를 빨리 뜨고 싶은 마음뿐. 날뛰던 강아지도 뭔가 불안한 낌새를 느꼈는지 순순히 따라왔다. 집 앞에서 벌어진 일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아무렇지 않은 척 조금만 걸으면 뒷마당으로 들어가 쏟아지는 민망함을 감출 수 있었다.

서둘러 울타리 문을 여는 순간, Ma'am, are you okay? 아무도 보지 않았으면 했던 장면을 누군가 생생히 지켜본 모양이다. 게다가 비슷한 시간대에 걷다가 늘 마주치던 동네 청년이라니. 아는 사람의 친절이 그때만큼은 정말로 달갑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 대신 퉁명스러운 대꾸를 내뱉고 얼른 문을 닫았다. 그리고 일 초 뒤, 아차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매몰차게 닫힌 펜스 문 뒤에서 황당해하는 청년의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좋은 날, 아주 짧은 산책은 나에게 피맺힌 외상뿐만 아니라 낯부끄러운 내상마저 깊이 남겼다. 

몸에 난 상처는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여 얼추 다스렸는데 마음의 자괴감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걱정과 웃음을 동시에 내비치는 가족의 위로가 영 못마땅했다. 막내 딸내미라며 마냥 이뻐하던 반려견도 그날은 정말 꼴 보기 싫었다.

고상하고 우아한 이성의 가면을 봄바람이 훅 벗겨버린 틈을 타, 본성이 고개를 쳐들었다. 다 너 때문이야! 라고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다. 복잡 미묘한 성질의 그물을 얼기설기 치고 먹잇감이 걸려들기만을 노렸다. 잡히기만 하면 모든 굴욕과 수치의 독을 몽땅 쏟아낼 요량이었다. 하지만 동물은 본능적으로 천적을 피하는 육감이 발달해 있나 보다. 가족뿐만 아니라 강아지마저 내 눈치를 살살 보며 거리를 두었다. 결국, 독기는 고스란히 나에게 스몄고 생활은 곧 마비됐다. 

오후 내내 침대에 쓰러져 있었다. 몸도 마음도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누워 내면을 들여다보는 고요한 시간만이 이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멍때리다 보니, 몹시 기죽어 있는 본성과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성질부리다 움츠려 있는 게 하도 딱해서 살며시 말을 건넸다. 겨울이 참 길었지? 오랜 시간 견디느라 수고했어. 짓눌렸던 어깨에 봄바람이 스쳐서 살짝 들떴구나. 그치? 못 알아줘서 미안해. 그럴 수도 있지, 흔들릴 수 있지, 뭐.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나니 힘을 잃은 감각이 스르르 되살아났다. 긴장한 근육도 노곤히 이완되고 영혼의 해독제가 밤새 꿀잠을 재웠다. 

다음날 새로운 기운이 솟았다. 밝은 얼굴로 어제 일을 깔깔대며 먼저 꺼냈더니, 곁으로 가족들이 모여들었다. 강아지도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뒷마당에 나타난 산토끼를 잡으러 또 튀어 나갔다. 사냥개 본성을 어찌 막으랴. 위태로웠던 감정의 방아쇠가 당겨지지 않고 무사히 넘어간 데는,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성찰이 본성과의 조우를 도왔기 때문일 거다.

모자만큼 익숙해진 마스크로 턱 아래 퍼런 멍을 가리고 다시 산책을 나선다. 남이야 멍이 들든 말든 자연은 온갖 군데 꽃무늬를 그리며 한껏 흥을 부린다. 부럽다 못해 얄밉게 봄이 또 현혹하지만, 이번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줄을 단단히 붙잡으리라. 그래도 오늘만큼은 그 청년을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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