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문해성] 평균적 미국인이라면

문해성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평균적 미국인이라면

 

아차,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커피숍에 가방을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아찔했다. 우리가 자리를 뜬지 벌써 20분이나 지났다. 커피숍을 나올 때 사람들로 가득했던 것을 생각하니 가방이 그대로 있을까 싶었다. 벌써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다면…. 남편은 운전면허증 등 신분증을 다시 신청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연말 쇼핑을 앞둔 시점에 카드를 모두 정지시키고 재발급해야 하는 상황을 못마땅해했다. 나는 죄인처럼 숨죽이며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 사람들의 양심을 믿고 싶었다. 혹시 누군가 카운터에 맡겼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런 내가 한심하다는 듯 남편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 줄 알아. 남의 집 앞에 놓인 우편물까지 훔쳐 가는 세상이라고.” 그가 던진 한마디에 마음이 더 아팠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차를 되돌려 가는 동안 계속 커피숍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 속도는 왜 그렇게 느린지, 속 타는 마음과 달리 저쪽에서는 전화 받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걸고 또 걸고 다시 걸기를 반복하여 간신히 연결되었다. 남편은 다급한 목소리로 혹시 맡겨진 가방이 없는지, 내가 앉았던 자리에 가서 확인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 자기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다. 잠깐 확인만 해주시면 안 되겠느냐고 애원하듯이 부탁하는데도 그럴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하다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싸늘한 반응은 실망을 넘어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이 아닌 로봇이 전화를 받은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5년이 넘게 1주일에 서너 번씩 가던 단골 커피숍이었다. 물론 최근에 주인과 종업원들이 대거 바뀌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도 서너 발자국만 옮기면 되는 작은 동네 커피숍이다. 

이 사건은 꽁꽁 언 빙판처럼 쉽게 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속상한 마음 탓인지 한 사람의 행위가 마치 전체의 의식인 것처럼 미국이 더 싫어졌다.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만 좀처럼 정이 가지 않는 나라, 마치 그것을 확인이라도 한 듯 씁쓸했다. 방한 코트 속으로 몸만이 아닌 마음마저 깊숙이 구겨 넣었다.

연말에 미국을 강타한 차가운 눈 폭풍은 크리스마스와 연말 휴가를 즐기려는 사람들을 공항과 도로에 가둬버렸다. 시애틀도 예외는 아니었다. 얼어붙은 도로는 아이스링크장을 방불케 했다. 며칠간 우리도 꼼짝없이 집에 갇혔다. 특히 뉴욕주에서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최악의 눈 폭풍에 대비하라는 경고가 연일 나오고 있었다. 사망자까지 속출하면서 춥고 우울한 연말이 될 것 같았다.

그때 텔레비전에서 언뜻 스치듯 들린 한국인 관광객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뉴욕주 윌리엄즈빌에서 한국 관광객들이 탄 차가 눈 쌓인 도랑에 빠져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삽을 빌리기 위해 가까운 한 집을 노크했는데, 그곳에서 친절한 알렉스 캠파냐 부부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부부는 운전하기에 위험한 날씨라며 관광객 10명에게 집 문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해서 2박 3일 동안 자신들의 집을 내주고, 같이 음식을 해 먹으며 풋볼 경기를 보고, 크리스마스를 보냈다는 미담이었다. 

같은 상황이 내게 생겼다면 어땠을까? 처음 보는 낯선 관광객들을 선뜻 집으로 들일 수 있을까. 집 벨이 울리면 문을 열기에 앞서 누군가를 먼저 확인하는 세상이다. 이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여러 방송국과 신문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알렉스가 기자와 인터뷰에서 한 말이 가슴에 남았다.

“평균적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했을 것.”

여기서 평균적 미국인이란 대부분의 미국 시민이란 말로 들렸다. 세상에는 역시 좋은 사람이 훨씬 많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내가 겪은 일도 따지고 보면 커피숍 직원의 잘못이 아니다. 모든 원인은 나의 부주의함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들이 내 일을 처리해줄 의무나 꼭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믿을 수가 없어, 라는 탄식은 단지 도덕적 기준의 문제일까.

내 가방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것도 양심적인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날 전화를 받은 직원은 어쩌면 너무 바빴거나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보통 때 그들은 밝게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네곤 했었다. 그런 친절은 잊은 채 내 급한 사정만을 생각한 나머지 상대를 원망했었다. 부정적인 단면만 보기보다 아름답고 밝은 면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싶다. 평균적인 미국인들처럼 작은 힘이라도 보태는 보통의 시민으로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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