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윤영목] 미국 전성기는 지나갔는가?(상)

윤영목(서북미 6ㆍ25참전 국가유공자회 회장)

 미국 전성기는 지나갔는가?(상)

필자는 유소년기를 중국(만주)에서 보내면서 중학교 재학중 8ㆍ15해방을 맞이했다. 귀국후 6ㆍ25전쟁 참전과 도미 유학후 직장생활중 중국 하얼빈 농업연구소 초청으로 41년만인 1986년 10월 제2의 고향 만주땅 방문길에 올랐다. 이 인연으로 그후 15~16회 중국 각지 농업연구소를 방문할 기회가 마련됐다. 

 정치인도 경제인도 아니지만 상식에 입각해 오늘날의 미국과 중국의 정세를 나름대로 분석해 보고자한다.

2차대전 종료 후 미국은 지구촌 유일무이의 초대강국으로 군림하게 됐다.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서 막심한 희생을 치렀지만 개전 초기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과 일본군 잠수함에 의한 오리건주 해안가 Ft.Stevens에 대한 10여발의 가벼운 포격피해 외에는 미국본토 피해는 거의 없었다. 

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즉시 적성국가였던 독일, 이탈리아를 포함한 서구 국가들과 일본의 재건 복구 사업에 착수했다. 소위 ‘마샬풀랜’으로 서구 구가들의 자유민주 체제와 경제 부흥을 촉진함으로써 상호간 교류 활성화와 이익을 추하는 동시에 소련 공산권에 대처 할 수 있는 자유민주주 진영 형성에 적극 노력했다. 

이로 인해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서구 수혜 국가들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급성장을 이뤘고 일본 역시 미국 원조로 오늘날의 경제대국이 가능해졌다.

한편 중국은 ‘항미원조’(抗美援朝) 구호하에 6ㆍ25전쟁중 중공군 수십만 대군을 한반도 전선에 투입해 한미 양군에 대적한 연유로 미국과는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에도 관계개선이 불가능한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개선이 구 소련과의 냉전 상태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게 된다.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은 키신저보좌관을 대동해 폐쇄된 미개국 중국을 방문해 개방과 미래 교역상대국 가능성을 타진하게 된다. 미국의 내심은 중국을 미국 영향권에 끌어들여 소련을 견제하려 한 것이었다. 그후 미ㆍ중간에는 정식국교가 성립되고 외교는 물론 경제면에서도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게 됐다.

미국은 중국의 방대한 저임금 노동력을 이용해 중국 현지에서 생산된 각종 생필품 등을 저가로 구매하게 되고 중국은 철저한 국가 통제하에서 박리다매 체제로 국가재정 축적에 총력을 기울여왔다. 

2차대전 종료 후 흔히 보이던 ‘Made in Japan’이 점차 ‘Made in Korea’로 전환되고 미중 수교 후에는 ‘Made in China’가 세계 시장 상당부분을 점유하기에 이른다. 

그동안 중국은 국가재정 확보에 전력을 기울여 최근에는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됐다. 중국의 능란한 상술이 여실히 증명된 셈이다.

경제대국이 된 중국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군비확충에 몰두해 각종 최신예 무기로 미국과 러시아와 더불어 3대 군사대국의 일원으로 등극했다. 

현재 미중은 대만사태와 반도체 분야 등에서 수교후 최악의 마찰을 빚고 있다. 미국은 당초 원했던 우방 중국이 오히려 적성국가로 변모한 것에 대해 새로운 외교 정책을 강구하고있다.

결론적으로 닉슨의 중국 방문은 ‘잠자는 사자, 중국을 깨워준 격’이 되었고 깨어난 사자가 깨워준 미국에 보복해오는 꼴이 연출되고 있다. 

국가체제와 이념이 상반된 미중 양국이 동반관계는 당초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동안 미국은 중국의 저렴한 각종 제품과 방대한 시장에 호황을 누릴수 있었고 중국은 미국 달러($) 비축으로 양국은 서로 호혜(互惠) 관계를 유지해왔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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