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정동순] 모든 방향 일단정지

정동순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장)


모든 방향 일단정지

 

우리 동네 뒷길 156번가에는 모든 방향 일단정지(All Way Stop) 교차로가 몇 군데 있다. 이 교차로에 진입하는 모든 차는 일단 정지해야 한다. 그런 다음 정지한 순서대로 출발하여 교차로를 지난다. 미국에서 처음 운전하는 사람에게는 다소 낯선 규칙이다. 동네가 생기며 길을 처음 냈을 때는 중심도로인 148가보다 한가한 뒷길이고 동네 사람들이 이용하는 2차선 도로였기에 신호등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출퇴근 시간에는 교통량이 꽤 늘었음에도 교차로를 통과하는 규칙은 그대로다.

모든 방향 일단정지 교차로는 몇 초 동안에 고도의 심리전이 펼쳐지는 곳이다. 오죽했으면 포 웨이 스탑 딜레마(4 way Stop Dilemma)라는 우스갯말도 있다. 누가 나보다 먼저 정지선에 서 있는지를 순간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동시에 멈추면 오른쪽 방향에 있는 차가 먼저다. 이 교차로에선 순간의 마주침만 존재한다. 정해진 규칙이 그러하다. 멈춰선 사람들은 곧 다시 출발해야 한다. 양보만 해서도 안 되고 딱 내 차례가 왔을 때 출발해야 타인들에게 혼동을 주지 않는다. 눈치가 빨라야 하고 좋은 거리와 차례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원 미시시피, 투 미시시피, 쓰리 미시시피.’ 운전면허 교관의 흔한 지시를 실천에 옮길 시간이기도 하다. 3초 이상 충분히 정지하지 않았다고 티켓을 받기 딱 좋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차례가 왔다고 해서 급하게 출발해도 안 된다. 차를 조금 움직이며 다른 차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며 지나가야 한다. 가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지, 이런 교차로에 익숙하지 않든지, 바빠서인지 자기 순서를 생각하지 않고 앞차를 따라가는 운전자가 있다. 자기 차례를 몰라 망설이거나 차례보다 급하게 나서는 이도 있다. 그런 차를 만날 때 대처하는 자세는 다양하다. 있는 힘을 다해 경적을 빠앙 울리는 사람, 가운뎃손가락을 힘차게 들어 올리는 사람, 창문들 내리고 큰 소리로 F. U.라 핏대를 올리는 사람, 별거 아니라는 듯 신경 쓰지 않고 가는 사람의 유형을 골고루 만난다. 

상대방이 규칙에서 벗어났다 해도 내 쪽에서 재빠르게 멈춰야 사고가 나지 않는다. 우선 브레이크 페달을 사뿐히 지르밟는 순발력이 필요하다. 나도 그럴 수 있다. 내 가족도 그럴 수 있다. 내가 존경하는 분도 그럴 수 있다. 내 이웃이다. 좋게 넘어가야 한다. 씩씩거려 봐야 순간 감정 배설은 될지언정 기분까지 망친다. 확 질렀는데 잘 아는 사람이면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사거리보다 복잡한 오거리에서 모든 방향 일단정지 신호 앞에 서는 날이 있다. 대여섯 앞에 있는 차들이 차례로 통과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뚝 선 정지신호 말뚝을 보게 된다. 신호 기둥이 쇠로 교체되는 추세지만 이 정지신호는 나무 기둥이다. 팔각형의 빨간 정지신호를 달고 있는 사각의 기둥의 본래 임무는 표지판을 세우는 일이다. 촘촘하게 박힌 녹슨 스테이플이 기둥의 시간을 말해 준다. 마치 기둥의 일부처럼 자연스럽다. 정지신호를 알리는 네모난 기둥이 그토록 많은 스테이플에 박히며 감당해야 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동네 사람들의 가라지 세일, 이사 세일, 잃어버린 개를 찾습니다. 차 팝니다. 생일 파티 이쪽으로…이웃들의 애환을 알리는 것도 기둥의 일이 되었다. 일단정지 장소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대부분 무심히 지나쳤겠지만, 시간이 조금 있는 사람들은 가던 방향을 틀었을 것이다. 애견인은 가슴 아파하며 잃어버린 개 전단을 사진으로 찍었을 것이다.

정지신호 앞에 멈춰 서서 가는 방향을 결정해야 했던 일들이 떠오른다. 남편이 큰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 중환자실에서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던 일, 이민이라는 큰 결심을 했던 때부터 직진해야 할 곳에서 머뭇거리다 기회를 놓친 일도 허다하다. 좌회전해야 할 곳에서 우회전해서 한동안 헤매기도 했다. 낯선 골목을 이리저리 돌다 다시 길을 찾아 나오기까지 손에 땀을 쥐며 긴장했던 시간이다. 

지금 생각하니 정지신호 앞에서 길을 잘못 들었던 일이 시간을 허비한 것만은 아니었다. 멈추지 않고 달리는 길에서 볼 수 없는 것도 찬찬히 볼 수 있었다. 골목에 들어가 봐야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시행착오를 겪었던 일들도 마냥 직진이 아니었기에 경험할 수 있었던 내 시간이었다. 내가 실수했을 때, 얼른 브레이크를 밟아 사고를 막아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순간의 마주침으로 고마웠다는 말도 못 하고 지나친 인연들이다. 길에서 수시로 만났던 팔각형의 빨간 정지신호. 멈추었다 가라는 지금 이 정지신호는 오늘 나에게는 또 어떤 의미인지 생각한다. 모든 방향 일단정지. 신호 앞에서 ‘원 미시시피, 투 미시시피, 쓰리 미시시피’를 센다. 풀어진 햇살이 정지신호에도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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