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공순해] 못
- 23-01-23
공순해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못
바이러스 치세 3년에 연필조차 떨어져 간다. 남은 걸 헤아려 볼 양으로 오늘은 연필 상자를 밑바닥까지 뒤집어 보았다. 고무줄, 클립, 핀, 압핀, 옷핀, 등 막상 필요할 때 절실히 아쉬운, 그러나 평소엔 잊고 사는 자잘한 잡동사니가 드러났다.
그 속엔 못도 들어있었다. 1인치 못을 집어 들자 뜻밖에도 눈앞에 뉴욕 생활이 확 펼쳐졌다. 그 시절엔 이사하고 제자리에 짐을 넣은 뒤, 다음 하는 일이 벽에 못 박는 일이었다. 그땐 아무 생각 없이 2인치 못을 사용했다. 하지만 다음 이사에서 왠지 벽에 2인치, 대못 박기가 미안해졌다. 벽에 상처 입히는 것 같은 심정이었달까. 차츰 못 박기가 망설여졌다. 그러다 1인치 못을 알게 됐다. 2인치보단 덜 미안했다. 후로 내 서랍 속엔 1인치 못이 굴러다니게 됐다. 차후로 그것도 미안해 잔못을 썼다. 시애틀로 왔을 땐 아예 못을 사용하지 않게 됐다. 최소한의 못 외에 액자 등은 그냥 바닥에 내려놓았다.
벽에 걸린 잡동사니들. 드라마에 보면 예전엔 벽에 옷도 걸고, 가방도 걸고, 심지어 빗자루 쓰레받기까지 걸었다. 선반을 걸어 물건도 보관했다. 일종의 공간 이용법이다. 하니까 대못 꽝꽝 쳐서 자리를 만들었다. 뉴욕에선 건물주들이 이사 나가는 집에 벽 구멍마다 페널티를 부과하기도 했다. 세입자들은 못 자국 때우는 비법을 서로 전수했다.
그때 왜 그리 못 박기에 열심이었을까. 벽의 장식적 기능 탓일 게다. 소위 인테리어, 벽에 액자 걸기는 상식(?)이다. 요즘 와 생각해 보니 그건 결국 생활의 전시였다. 아끼는 그림과 아이의 자라는 모습, 자랑거리, 가족사에 기념될 만한 사건, 등을 사진으로 전시한다는 것은 보이기 위한 것. 자기표현의 한 방식, 정체성 드러내기의 한 방식이 아니었을지. 전시와 과시의 중간 지점에서 삶을 보듬는 행위이기에 건강한 욕구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득 킥 웃음이 터진다. 그건 요즘 말로 개취지. 개인의 취향. 그러자 생각이 빠르게 더 이어져 나간다. 사람 사는 흔적이 못 자국인지도 모른다고. 이사를 위해 벽의 것들을 다 걷어내려, 삶을 치우자 말할 수 없는 쓸쓸함이 엄습했다. 빈 벽의 휑한 못 자국에서 감당키 어렵게 마음이 흔들렸다. 못 자국이 넌지시 말했다. 나를 상처 입히고 또 어디로 가 상처를 보태려 하는지요. 나는 서글프게 대답했다. 그래, 또 낯선 곳으로 가야겠지. 가서 어설프게 못 자국을 남기는 일을 반복해야겠지. 어쩔 수 없이 또 떠난다. 잘 있거라. 뉴욕을 떠나며 구슬펐던 마음이 새삼스럽다.
못 자국은 또한 일종의 확증인지도 모른다. 삶의 확증, 온갖 욕망의 확증. 가장 유명한 못 자국은 예수님 몸에 있다. 인류의 욕망이 집대성된 못 자국. 즉 플랜 A였던 에덴동산, 그 주인께서 베푸신 플랜 B가 가동하기 시작한 순간, 예언이 실현되는 순간의 확증이었다. 심지어 예수님은 도마에게 고통이 승화된 그 거룩한 흔적을 통해 부활을 확증시키셨다. 그 사랑의 흔적으로 도마는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써의 삶을 확증했다. 우리도 그런 확증을 받았음에도 알게 모르게 그냥 흘려버리는 건 아닐까. 지난 한 해 그냥 흘려보낸 것들엔 무엇이 있을까. 바이러스와 싸우며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깨달은 것만으로도 소득이 있었던 게 아닐지. 감염된 이웃을 걱정하고 서로 돕는 일에 관심을 좀 더 기울이게 되었으니.
나아가, 생각해 보면 못이 한 곳에만 박히면 상처 같은 흔적을 남기지만 여러 곳에 박히면 물건이 만들어져 나온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가구가 된다. 집이 지어진다. 세상 모든 나무 제품은 못으로 결합하여 존재가 형성된다.
게다 나무 그릇 등이 터지거나 벌어진 곳이 있으면 이를 이어주는 거멀못도 있다. 관계를 이어주고 회복시키는 못의 기능에 대해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바, 못마다 역할이 다르다는 점도 흥미 있는 발견이다. 가장 상징적인 거멀못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다.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해 준 유일의 못.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 사람의 몸을 입고는 지구의 근본 힘인 중력을 벗어날 수 없다. 십자가에 박힌 못으로 하여 들림 받아 중력을 초월하셨다. 하여 끊어진 사랑을 이어주셨다. 상처에서 시작해 사랑의 회복을 발견하다니.
못은 철물에 불과하다. 그 못으로 상처를 만들어내든 회복을 만들어내든 그건 인간의 손이 쓰임 받는 일이다. 못을 잘 활용하여 올 한 해가 즐겁길 바란다. 잘 드는 칼로 부지런히 연필 깎아서 이 즐거움을 기록으로 남겨야 할 듯싶다. 예감이 좋다. 우리 모두에게 해피 뉴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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