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수필-이희영] 혼란을 즐기자

이희영(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혼란을 즐기자


네 살 막둥이와 오랜만에 동네 산책을 나왔다. 한쪽 거리는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하는데 길 건너 쪽 하늘은 맑고 파랗다. 아이도 서 있는 자리에서는 눈송이가 얼굴에 와 닿는데 몇 발짝도 안 되는 건너편에는 눈이 오지 않는 게 신기한 모양이다.

“엄마, 여기는 스노우 몬스터야?” 

자기가 서 있는 곳은 눈 괴물이 있어서 눈이 오고, 몇 발짝 앞으로 간 곳은 눈 괴물이 없어서 눈이 안 오는 거냐고 물어본다. 날씨에 대한 막둥이 식 해설이 꽤 재미있고 설득력이 있다.

어린아이와는 달리 나는 이런 날씨가 혼란스럽기만 하다. 얽히고 정리되지 않은 복잡한 나의 마음 같다. 2022년은 하루하루가 혼란의 연속이었다. 아픈 아이가 혹시라도 코비드에 걸릴까 봐 매일 살얼음판을 지나듯 긴장 가운데 살았다. 팬데믹이 끝나나 싶어 숨을 좀 돌리려 했더니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 사는 게 팍팍해지고, 여름에는 마을 근처의 산불 때문에 마음을 졸여야 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아픈 아이를 데리고 산불대피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팬데믹 이후 학교로 돌아간 넷째가 ADHD라는 판정을 받았다. 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아이였는데 더 이상 학교에 오지 않았으면 하는 아이가 되고 말았다. 어딜 가도 귀염을 받던 아이가 갑자기 미운 오리 새끼가 된 듯하다. 하루가 멀다고 들려오는 아이에 관한 이야기들은 여전히 생소하기만 하다. 혼란스럽다. 

어떤 일이 있어도 늘 아이들의 편에 서 있는 엄마가 되겠다고 굳게 다짐했지만, 아이의 과잉행동과 예상치 못한 언행들로 인해 엄마인 내가 흔들리고 있다. 자기 행동은 절대로 고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학교는 계속 가고 싶다는 아들을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모르겠다. 아이의 행동에 문제가 있는 건 알지만 ADHD라는 진단을 막상 받아들이기가 꺼려진다. 카운슬러가 권하는 ADHD에 관한 책을 내가 아직도 사지 않은 것은 이런 마음 때문인 것 같다. 생명을 위협하는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성장 과정 중에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혼란 속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예상치 못한 산책길의 날씨에 혼란스러워하는 나와 달리 네 살 난 아이는 상황을 금방 받아들였다. 오히려 이런 날씨를 재미있어한다. 한쪽은 스노우 몬스터가 지배하는 지역, 길 건너 다른 한쪽은 몬스터가 없는 구역이라고 이해한다. 스노우 몬스터를 피해서 앞으로 가자고 잰 걸음으로 나를 재촉한다. 고개를 젖혀 쏟아지는 눈송이를 얼굴에 맞아보기도 하고 한달음에 뛰어서 눈이 내리지 않는 건너편으로 가기도 한다. 어린 아들은 자신 앞에 있는 혼란을 즐길 줄 안다. ‘당신의 혼돈을 사랑하라.’ 알베르토 에스피노사의 말이 떠오른다.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던 시인의 메시지가 이제야 어렴풋이 다가온다. 버겁게만 생각했던 나를 둘러싼 혼란들을 네 살배기 아들을 보며 내려놓는다.

어느새 저만큼 뛰어가던 아이가 뒤를 돌아본다. 

“어머니, 스노우 몬스터 안 무셔워?” 

어머니라 부르는 막내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하다. 내게는 요지경 같은 날씨가 아이에겐 재미있는 모양이다. 아이와 함께 걷기를 잘했지 싶다.

2023년 계묘년을 며칠 앞두고 있다. 이번 계묘년은 흑토끼의 해라고 한다. 토끼라고 하면 하얀 토끼만 생각했는데 내년에는 까만 토끼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우리 막둥이처럼 혼란을 즐기며 한해를 보내리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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