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수필-홍정기] 봄을 기다리는 마음
- 23-01-03
홍정기(오레곤문인협회)
봄을 기다리는 마음
봄을 영어로 번역하면 Spring이다. 이 말은 용수철을 뜻하는 영어단어와 같다. 그래서 Spring이란 단어의 기원을 찾다 보니 '활력, 튀어 오름, 솟아오르다'와 같은 뜻도 함께하고 있다. 봄은 산과 들의 죽은 듯이 잠자던 풀과 나무, 개구리와 곰마저 기지개를 켜고, 새싹이 솟아나는 계절이다. 그래서 겨울 다음에 오는 봄은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게 하고, 가슴마저 부풀게 한다.
지난해 초겨울부터 잎이 떨어지기 시작한 나무는 십일월 중순부터 겨울잠이 들어 고요하고 적막감이 돈다. 오레곤 지역은 겨울철이 우기임에도 천지를 새하얗게 덮을 정도로 많은 눈도 내렸다. 변두리 포도밭 가지에는 뽀얀 목화솜 꽃이 활짝 피었고, 우리 집 뒤뜰 텃밭에 있던 배추도 살짝 감기를 앓았다. 뭐니 해도 겨울 정취는 흰 눈이 내려야 한껏 느낄 수 있다.
미국으로 이민 온 지도 훌쩍 40년이 넘었지만, 해마다 겨울이 오면 고향 무주 구천동 겨울 생각이 아련히 떠올라 향수에 젖는다. 그때 겨울은 무척 춥고 배고픔에 온몸을 떨고, 가난한 삶을 눈물로 한숨지으며 보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전직 중등교사였던 아버지와 유치원 교사 출신 어머니의 가계 파탄으로 가난에 찌들었던 어린 시절의 빛바랜 추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산골짜기 이 마을 저 마을 돈과 곡식을 꾸러 다니시던 어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도 ‘어머니’라는 단어는 나를 문물 짓게 만든다.
오리 넘게 나뭇짐을 지고 가면 곡식과 바꿔주던 부잣집 안주인 아주머니는 나의 효심을 칭찬하며 나뭇값보다 더 많은 보리쌀을 자루에 담아주었다. 그 무렵 10여 년 세월의 긴 겨울은 그분의 깊은 사랑과 따스한 온기가 우리 가족의 한기를 녹여주었다.
또래 장년층의 기억 속에는 모두 힘들었던 그 시절의 빛바랜 회색 추억이 가득하다. 누구는 검다고 했고. 누구는 보랏빛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빛과 색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빛바래고 색이 엷어져 가물거리는 회색이 되었다. 그런데도 그 시절이 아프거나 그리울 때면 문득 또렷이 다가와 새하얀 밤을 지새우게 한다.
누구에게나 봄은 오고 계절은 기다림에 관계없이 되풀이한다. 그런데도 봄을 더 절실히 기다리는 이는 마음이 가난하고 따스하여 다른 이의 아픔이나 슬픔을 온전히 가슴에 품어주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마음은 연푸름이다. 스프링처럼 솟아나는 새싹의 색이다.
새싹은 긴 겨울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웅크림과 다짐의 결실을 쌓아 싹틔운 여린 연록의 새싹은 힘의 원천이자, 순수함의 표징이라 더욱 감동스럽다. 금세라도 태울 듯한 눈부신 햇살도 갓 태어나 배냇짓 하는 아기 웃음 앞에 고개 숙이고 새싹을 틔우니, 봄은 기억 속 어머니 색이다.
역사는 늘 겨울을 즐긴다. 힘을 쓰고 싶어 안달하는 독재자의 포효는 세상을 얼어붙게 한다. 하지만, 봄을 그리워하는 야생화의 끈질긴 미소와 몸짓은 겨울왕국을 녹여 오색 창연한 꽃망울을 터뜨린다. 봄에는 멀리 계신 어머니가 꽃길 따라 내 가슴에 오신다. 봄은 희망이다. 아무리 추위가 맹위를 떨쳐도 어머니처럼 봄기운을 불러들여 언 몸을 녹여주고, 봄의 소리는 깊은 울림으로 퍼져나간다.
입춘이 지났으니 봄의 전령사가 곧 운을 띄우리라. 지난주 오레곤 해변에서 홍매를 보았으니, 곧 포틀랜드에도 곧 봄의 영춘화(迎春花) 개나리도 피고 벚꽃과 이파리 없는 매화도 피겠지. 봄을 맞이하는 마음은 봉긋하다. 솟는 설렘과 괜히 우쭐해지는 즐거움도 있다. 희망처럼 다가오는 본격적인 한 해 시작 어떤 채색을 해볼까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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