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수필-최은희] 라떼는 말이야

최은희(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라떼는 말이야

“나 때는 말이야”
이 말이 나오려 할 때마다 멈칫 조심스러워진다. 그 말이 나만 옳다는 편협하고 독선적인 어른들의 꼰대질로 치환되어 부정적 의미로 쓰인단 사실을 알고 부터였다. 사사건건 지적하는 어른들을 비아냥대고 비꼬는 신조어라고 한다. 그들만의 은어로 약간 비틀어 사용하다 보니 '나 때'가 '라떼'로 변한 셈이었다. 

앞으로 살아갈 시간보다 살아온 시간이 더 많은 노인이 버릇처럼 지나간 시간을 언급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시작되는 서두가 그 말인 걸, 소위 내가 기성세대로 편입되고 나니 불편하고 억울한 심정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저 부질없는 하소연일 텐데 그조차 듣기 싫어 귀를 막고 싶어 하는 젊은 세대의 세태를 반영하는 말이니 말이다. 당신들과는 한마디도 나눌 수 없으니 첫마디조차 내뱉지 말란 소통을 거부하는 단어 선택이 몹시 씁쓸하다. 그래서 무심코 터져 나오려는 그 말에 입막음하느라 바쁘다.

세대 갈등, 분명히 있을 법한데 실체가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 모호한 존재였다. 언제 이렇게 자리 잡았는지 정작 기성세대들은 알지 못한다. 스마트 폰과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이용한 그들만의 놀이 공간에서 구세대를 맘껏 조롱한들 어찌 알겠는가? 귀를 활짝 열고 할머니에게 옛날얘기를 졸랐던 우리 유년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옛날 옛적에'하고 시작되는 이야기는 빼곡히 쟁여져 쌓인 장엄한 시간 속, 어느 한 매듭을 풀어 헤치려 시작하는 말이었다. 유구한 세월의 흔적으로 쓰러져가는 폐가와 어우러져 이끼 낀 고목들이 딸려 나온다. 그냥 빛바랜 사진첩이 되어 세월 따라 흘러가는 회색빛 과거가 머물러 있다. 

영겁의 침묵만이 존재하는 신의 공간, 다가갈 수 없는 심연. 이렇게 세월은 모든 걸 변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한때 거기에 있던 사람들의 생기 가득했던 그 시간은 달빛 아래 처연히 물드는 전설이 되었다. 할머니의 할머니 그 이야기 속의 시간은 더디다. 

지구촌이라 불릴 정도로 소셜 미디어가 활성화 되어 오지 곳곳까지 미세한 그물망으로 연결된 사이버 세계는 세월을 뛰어넘고 세상을 넘나든다. 몇 번의 클릭만으로도 가능한 세상, 햄버거 커피가 나오고 사랑도 나온다. 날카롭게 상처를 내고 때론 목숨까지 앗아가는 무지막지한 칼날이 되기도 한다. 

태양 아래 찬연히 빛나는 현재는 숨 가쁜 세상이다. 팽팽 돌아가는 중심에서 어떻게든 버텨 보려 애쓰지만 역부족이다. 그 몇 번의 클릭이 어려워 점점 옆으로 밀려나 어느새 한 귀퉁이에 비켜 서 있다. 

굼뜨고 더딘 육체를 가진 지금에서야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옛날 옛적 이야기, 이제는 얼마든지 들어 줄 수 있는데 예전 말하던 이들은 모두 사라지고 내 말을 들어 줄 이는 귀 막고 서로 다른 소통의 수단을 가지고 살아간다. 도돌이표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며 대물림되는 인생의 한 단면이겠지. 

고리타분한 넋두리로 여겨졌다. 예전에 부모에게 했던 무심하고 성의 없던 행동들은 그래서였다. 부모의 나이가 된 지금, 업보처럼 고스란히 내게도 닥치니 이젠 알겠다. 사람이 사람을 추억하는 버릇이다. 사람이 사람과의 인연을 반추하는 버릇이다. 그래서 같이했던 하루하루가 순식간에 그리움이 되고 추억이 되는 이 나약함, 나이가 들수록 지독해지는 고질병이다. 

아뿔싸! 이렇게 또 주저리주저리 '라떼는 말이야'를 풀어 놓는다. 결국 나도 못 말리는 꼰대가 되었다. 하지만 그대들은 알까? 한겨울 눈 내리는 가운데 서서 유월의 빨간 장미를 생각한다고. 꿈꾸고 갈망했던 시간의 조각들이 서성일 때 우리도 늘 그 언저리에 머문다고.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이라 않던가? 

*푸시킨 <삶> 중의 한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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