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수필-이대로] 세모(歲暮)의 고백
- 23-01-02
이대로(서북미문인협회 회원)
세모(歲暮)의 고백
코로나 때문에 올해도 말도 제대로 못한 채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유리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나무들은 옷들이 다 벗겨졌고 어떤 키 큰 나뭇가지에는 까만 새 둥지만이 덩그러니 걸쳐 있다. 그 너머 병풍처럼 펼쳐진 짙푸른 하늘에 유유히 떠있는 하얀 구름이 흘러간 날들을 펼쳐 보인다.
난리 통에 남편과 시어머니를 잃고, 남자 장정들도 힘든 농사일을 혼자서 이끌면서 어린 4남매를 기른 어머니의 피땀 어린 고생을 옆에서 보았다. 어떻게 하면 어머니의 고생을 덜어드릴 수 있을까 하는 간절함이 가슴 속 깊숙이 쌓였다. 어머니는 논밭을 팔아서라도 나를 대학에 보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하면서 주경야독할 결심으로 야간으로 학적을 옮겼다.
1960년대 한국의 1년 개인소득이 100불이었던, 당시의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극단적 선택도 생각했던 아픔의 시간 10년을 통해 얻은 야간대학 졸업장으로 그나마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었다.
1976년 3월 15일,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로 이민하게 된 나는, 뒤에 남아있는 어머니와 형제 자매들을 생각하면서, 기쁨보다는 죄책감에 가슴이 아팠다. 비행기 안에서 기도했다. 미국에 가면 꼭 성공해서 어머니와 다른 식구들을 초청하겠노라고. 이민와서 6개월 동안 지나면서 보고 느꼈다. 잘 사는 나라에 산다고 그냥 잘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든 것이 다른 이국 땅에 뿌리를 내리려면 고생은 필연이라는 것을, 성공해서 초청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뜬구름 잡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러나 이 좋은 곳에 어머니와 형제 자매 식구들을 초청하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간절해지기만 했다. 이왕 맞을 매 빨리 맞을수록 좋다고, 이왕 이민해와서 겪어야 할 고생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당하는 게 상수라고 생각했다. 수소문한 결과 미군에 입대하는 길이 있음을 알았다. 33세에 19세 젊은 청년들과 어울려 훈련을 마치고 타코마에 있는 포트 루이스에 부대 배치를 받았다.
시민권 시험을 치르고 초청장을 보냈다. 비자 발급에 필요한 재정 보증서와 취업 보증서를 마련해서 같이 보냈다.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입국 날짜까지 정해졌다. 내가 이민해 온 지 3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특급열차를 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세상 길은 꼭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들이 입국한다는 때에 맞춰 우리 부대는 아프리카에 평화유지군으로 파견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청천벽력이 다른 게 아니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공항에서 국제미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의가사 제대를 신청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본부로 올라가는 제대 신청서에는 반드시 중대장의 서명이 있어야 한다. 중대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자기 예하의 한 장병이 복무 연장을 하게 되면 중대장의 근무 성적이 올라가지만 반대로 조기 제대하면 점수가 내려가기 때문에 어림도 없다는 것이 다른 사람의 증언이었다. 자꾸 졸라대는 수밖에 없었다. 귀찮은 듯 중대장은 경고했다. 조기 제대하면 내가 가진 시민권도 박탈당하고 한국으로 추방될 수도 있으니 아예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갈수록 산이었다. 식구들이 공항에서 국제 미아가 되는 것도 끔찍하지만 내가 추방당하는 결과가 온다면 어찌된단 말인가?
사실이라도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도서관에 가서 ‘제대’에 관한 책을 빌려다 읽어봤다. 제대는 명예, 준 명예, 일반, 그리고 불명예 제대의 4종목의 제대가 있으며 종류마다 특혜와 벌칙이 있었다. 불명예제대를 당할 경우는 중대장이 말한 대로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출국 당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불명예가 아니고 일반 제대에 해당한다. 일반제대에도 벌칙이 있었다. 재입대가 허용되지 않는다. 나와는 상관없는 벌칙이다. 몇 번을 읽고 또 읽은 다음 중대장한테 간청했다. 출국을 당하게 되더라도 꼭 조기 제대해야 할 처지이니 선처해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아직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나의 경우 출국을 당하는 일은 없지만, 중대장이 서명을 안해주면 신청 자체가 시작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 후 중대장에게서 호출이 왔다. 하나님의 도움이 있었던 모양이라고 하면서 나의 제대를 축하한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자기도 이틀 후에 제대한다는 것이었다.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본인도 제대해야 하는 마당에 굳이 고가점수 때문에 나의 신청서에 서명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와 형제자매 식구 17명은 씨택공항의 환영을 받았다. 우리 식구 4명을 합쳐 21명이 한 집에서 한동안 같이 지냈다. 43년 전의 얘기다. 지금까지 모두 다 열심히 잘 살아왔다. 21명이었던 식구가 77명으로 늘었다. 두 어머니, 장모님과 어머니는 장수하시다 소천하셨고, 막내 매제가 2년 전에, 그리고 우리를 이곳으로 올 수 있게 다리를 놓아준 처형도 작년에 돌아가셨다. 나도 내일 모레면 80이다. 자식 따라 형제자매 식구들과 많이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오기도 했지만, 코로난가 뭔가 하는 것 때문에 오랫동안 서로 만나질 못했다. 매제와 처형의 장례에도 참석을 못했다.
집을 떠나 봐야 고향이 그리운 것을 알게 된다는 옛말을 실감한다. 그동안 나는 모질게 형제 자매들을 괴롭혔다. 어머니에게 잘해 보려는 일념과 초청인으로서의 강한 책임감과 노파심으로 형제 자매를 핍박하고 닥달했다. 나도 열심히 살았지만, 그들은 더 열심히 살았다. 나보다 3년 늦게 왔지만 3배나 더 열심히 살아온 그들이 대신 성공을 이루었다. 46년 전에 내가 꾸었다가 포기했던 꿈을 그들이 이루었다. 그래서 미안하고 기쁘고도 고맙다. 이 모든 과정이 천사 같은 아내의 찬성과 도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지난 날들 동안에도 해주셨고 남은 날들 동안에도 베풀어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무한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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