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수필-박태수] 겨울눈(冬雪)과 겨울눈(越冬芽)

박태수(오레곤문인협회 회원)

 

겨울눈(冬雪)과 겨울눈(越冬芽)


올 겨울 들어 눈다운 눈이 쉬지 않고 내린다. 어젯밤부터 사락사락 내리던 눈이 아침에 일어나 바라본 창밖 풍경은 밤사이 온 산을 새하얀 옷으로 갈아입혔다. 눈구름은 시야를 가리고, 먼발치의 주흘산 산정 여인을 만나지 못하게 시샘한다. 집 밖 장독대에 쌓인 눈을 보니 색만 다를 뿐 아이들과 어릴 때 함께 보았던 은하철도 999에 등장하는 메텔의 모자 같아 정겹다. 

젊을 때, 누군가와 눈길을 걸으며 낭만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군에 입대하기 전 아내와 둘이 눈길을 걸었던 추억이 뇌리에 장독대 눈처럼 쌓였으나 군 복무할 때 눈과 얽힌 사연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고, 제대 후에도 트라우마처럼 한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1972년 1월 4일 논산훈련소로 입소하여 신병 교육을 마치고 춘천에 있는 103 보충대를 거쳐 강원도 인제에 있는 3군단으로 배치되었다. 트럭 뒤 칸에 신병들을 태우고 자대로 호송하는 부사관의 첫마디가 “인제 가면 언제 가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하며 위로하듯 얄밉게 빈정거렸다.

자대 배정을 받고 신고식 할 때, 도시에서 겪었던 눈에 대한 추억을 한 가지씩 이야기하라고 주문한다. 신병들은 추억의 실타래 풀자, 한 간부는 밑도 끝도 없이 “곧 다가올 겨울을 기다려라, 너희들의 이야기처럼 눈이 아름다운 낭만만 가졌는지 그때 알게 될 것이다” 하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한다.

그해 8월이 되자 매일 높은 비탈 산에 올라 싸릿대를 베어야 했고, 9월에는 베어 말린 싸릿대를 산 아래 부대로 옮겨야 했으며, 10월에는 잎을 털고 눈 쓸 빗자루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만들었다. 그제야 이 빗자루로 진부령 길의 눈을 쓸어야 하는 사연을 알았다.

지금은 고속도로로 이어지지만, 당시 인제에서 진부령을 넘어 속초나 고성으로 가는 길은 도로 사정이 외길로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최악이었다. 이 길은 태백산맥 서쪽인 내륙에서 동해안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군 작전도로여서 겨울철에는 항상 제설작업을 해야만 한다.

3군단 예하 부대는 관리해야 하는 할당된 지역이 있다. 한밤중에 눈이 내리면 치워야 했고, 폭설이 내릴 땐 각급 부대장이 순찰하며 제설작업을 독려하였다. 당시 부대장께서는 “이 길이 막히면 고성과 속초는 북한 땅”이라고 하였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입대 후 첫 겨울을 보내고 휴가 갔을 때, 동상을 입은 손과 발을 보고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 후로는 겨울에 눈이 내리면 군 생활할 때 트라우마 같은 추억이 떠올라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

산촌에 겨울철 함박눈이 내리면 모든 것을 한순간에 새하얀 옷으로 갈아입히는 자연의 마력 같은 힘은 경이롭다. 하지만 내린 눈이 녹을 때까지 외출할 수 없어 오롯이 집에 갇혀 나만의 사유를 즐긴다. 어제 뒷산에 올라 정을 주고 가꾸는 소나무를 살폈다. 집 뒤편 낙엽송 군락은 벌써 옷을 벗어 던지고 무뚝뚝하게 서서 말없이 내년을 기약하지만, 낙엽송과 참나무 군락에 한 자리를 잡고 있는 군계일학의 소나무는 젊은 청춘처럼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푸르름을 자랑한다.

지난겨울에도 폭설이 내려 무게가 제법 무거워도 가지를 부러뜨릴지언정 고개를 숙이지 않는 선비 같은 자태를 보았다. 오늘도 눈이 많이 내려 창밖에 보이는 소나무는 가지가 있어 알프스 요정이 사는 집 정원에 있는 사이프러스 눈꽃보다 더 아름답구나. 

산촌의 겨울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추위가 힘들지만, 자연 속 식물도 혹독하고 잔인한 계절이라 추위를 이겨 내지 못하면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다. 특히 한해살이가 아닌 여러해살이 식물이나 수목은 잎이 떨어진 자리, 줄기나 가지 끝에는 추위를 견디며 겨울눈(越冬芽)을 만들어야 내년에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수 있다.

식물의 겨울눈은 ‘잎눈’과 ‘꽃눈’ 두 가지가 있다. 잎눈은 잎의 압축된 유전자 정보를 가지고 있고, 꽃눈은 꽃의 압축된 유전자 정보를 갖고 있으며, 둘 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도 식물의 겨울눈은 매우 소중한 생명체이다. 이 작은 겨울눈은 겨울 추위로부터 개체를 보호하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햇볕이 날 때는 살금살금 겨울눈을 키워 돌아올 봄을 기약한다.

아파트 거주가 대세인 시대, 산촌의 장독대와 지붕에 쌓인 새하얀 눈을 바라볼 때 도시에서 볼 수 없는 추억 속 그리움과 포근함에 젖는다. 온종일 내리는 눈발을 바라보며 내일 걱정은 잠시 잊고 뇌리에 잠자는 옛 추억을 불러낸다.

입대 직전인 1971년 12월에는 에릭 시걸의 소설 ‘러브 스토리’를 영화화하여 국내 첫 개봉 하였다. 마침 연말이라 젊은이들의 마음이 울렁거렸고, 성탄절이 생일이라 두 몫으로 즐기기 위하여 아내와 함께 이 작품을 70mm로 상영하는 대형 영화관에서 감상하였다.

불멸의 OST인 ‘Snow Frolic’을 Francis Lai 악단이 연주하였고, 시작부에서 두 연인이 눈밭을 이리저리 술래잡기하듯 뛰고 눈 위를 뒹굴며 장난치며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에서 주제곡은 영화를 돋보이기 충분하였다. 두 사람이 눈 장난을 치며 온몸으로 속삭이는 사랑의 표현은 순수하였고 당시 청춘들은 이 영화를 보며 황홀경에 빠지기 충분하였다.

그해 12월 24일 성탄 전야는 눈이 많이 내리진 않았으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었고, 성탄절에 본 러브스토리 영화 속 눈과 사랑의 낭만이 뇌리에 남아 있다. 입대 신고 때 영화를 보지 못한 소대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그해 겨울은 진부령 길에 쌓인 눈을 치우느라 너무나 힘들어 눈에 대한 낭만이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지난주 한국에서 몇십 년 만에 내린 폭설을 보고 오레곤 카이저로 돌아왔건만,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하염없이 흰 눈이 소복이 내려 정원 장미 덩굴에 눈꽃을 피웠다. 겨울철에 눈이 많이 내리면 봄이 아름답고 하지 않았던가. 동설(冬雪)이 월동아(越冬芽)을 잘 틔어 새해에는 더욱 풍요롭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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