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김윤선] 나무 그림

김윤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나무 그림


그날 아침, 웬 사람 서넛이 나무 곁에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표정으로 보아 나무에 관한 얘기인 듯 위를 올려다보곤 했다. 훤칠한 모양새에 거북의 등처럼 갈라진 겉껍질이 단단하고 적갈색의 가지엔 잎이 무성했다. 흔치 않은 적송이었다. 나는 설핏 눈 맞춤만 하고 지나쳤다.

다음날, 산책길에 나무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간 가로수인 벚나무에 가려져 있다가 이 무렵 빈 가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는 그 집 앞마당에 있었지만, 길갓집이어서 개인 소유인지 동네 소유인지 불분명했다. 잔가지들이 이층 창문을 가리고 있었다.

수령이 오래된 듯 군데군데 옹이가 박혔지만 위엄있었다. 반듯한 모양새가 세상에 초연한 내면의 깊이 같은 걸 지닌 듯했다. 그런데 밑동에서부터 갈라진 또 하나의 줄기가 있었다. 바짝 붙어 있는 게 의좋은 남매 같기도 하고 어미와 자식 같기도 하고 연인 같기도 했다. 위로 올라가자 한 줄기가 휘어져 한동안 밖으로 내닫다가 슬그머니 원줄기 가까이 다가와서는 일정 간격을 두고 나란히 자라고 있었다. 그림이 그려졌다.

셀 위 댄스? 여인은 남자의 발등에 올라서서 허리를 남자에게 내어준 뒤 가슴을 뒤로 젖히고 있고, 남자의 팔은 여인의 허리를 감싸고 있다. 여인의 몸 중심이 남자의 팔에 있으나 우아하면서도 품위 있다. 믿음과 사랑이 느껴진다. 이윽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 그들은 호흡을 고르고 나란히 서 있다. 한 자 정도 띄운 거리가 되레 편안하게 보인다. 서로를 존중하는 자세처럼도 보인다. 길손들의 눈길을 가리듯 허리에서부터 촘촘하게 세운 잎으로 몸을 가리고 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하니 저들이 살아온 흔적 같다. 뜨거운 사랑 뒤에 오는 갈등. 발목을 저당 잡혔지만, 서로가 좀 더 멀어지고 싶은 욕구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판도라 상자 속의 감정들이 비단 인간만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마침내 화해했으리라. 관용과 인내가 삶을 더 울창하게 한다는 걸 말이다. 

산마루에 동네가 형성되면서 동료 나무들은 다 베어지거나 다른 곳으로 떠났는데 자신만 그 자리에 오도카니 남은 건 쉼터를 얻으려는 공사장의 사정이었을까. 그런데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뒤에 만난 소음과 거친 발자국들, 그리고 어둠을 견뎌야 하는 나무의 두려움은 어땠을까. 정말이지 나무에겐 누군가의 체온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위로받고 싶은 마음과 기대고 싶은 육신, 반드시 내 편이라야 하는 절박함이 서로를 키우고 몸피를 늘이지 않았을까. 그 누구도 나를 업신여기지 말라는 선전포고 같은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두려움은 절망의 또 다른 이름이며 그것을 달래는 건 사랑이라고 한다. 아무리 훑어봐도 손에 잡히는 것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서 나무가 배운 것 역시 사랑과 믿음 아니었을까. 등 돌리고 휘어졌던 줄기가 다시 몸을 돌려 나란히 함께 자란 이유이지 싶다. 

남편과 나는 어릴 때 만났다. 사랑을 알기 전부터였다. 함께 사춘기를 보내고 함께 성년이 됐다. 그리고 결혼했다. 그런데 잘 안다고 여겼던 하찮은 것들조차 환상이고 착각이었다는 걸 안 것은 결혼하고 나서였다. 갈등했다. 그러나 갈등을 이긴 건 믿음이었다. 세월이 준 선물이었다. 

남편과 나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면 어떤 나무가 될까. 꾸불꾸불 얽히고설킨 등나무를 닮은 나무일까. 아니면 저 따로 나 따로, 제 고집만 피우느라 빈속인 대나무를 닮았을까. 그도 아니면 사랑하고 미워하고 화해한 저 소나무처럼 어느 한 부분을 지나고 있는 것일까. 

판도라 상자 속의 감정들이 삶의 여정임을 안 것은 한참을 살고 난 뒤였다. 그것들을 거르고 난 뒤에 생기는 빈자리, 그 자리엔 새로이 채울 많은 게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돌아와 마주 선 나무가 아름다운 것처럼.

12월, 한 해를 보내는 끄트머리다. 나무 곁에 선 나도 어느새 그림 속 물상이 된다. 나무는 나이테 한 금을 그리고, 나는 주름 하나를 긋는다. 빈자리를 만들고, 새로이 채우는 게 내 새해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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