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칼럼-전병두 목사] 엘리스의 이름을 지우는 마음
- 22-12-25
전병두 목사(오리건 유진중앙교회 담임)
엘리스의 이름을 지우는 마음
연말을 앞두고 늘 하던 일 중의 하나는 벽걸이 달력을 친구들에게 보내는 일입니다.
금년에도 추수 감사절을 보낸 다음 큼직하게 날자가 새겨진 달력을 포장하여 우체국으로 달려갔습니다. 일반 우편물보다도 훨씬 긴 달력을 우체국 카운터에 올려 놓고 하나 하나 저울에 달아 우송료를 지불하였습니다. 배달부 아저씨가 집집마다 이 달력을 전하기 위하여 얼마나 수고를 해야 할까 미안한 마음을 달래면서 우체국을 나왔습니다.
그로부터 두 주 정도가 지나면 주소가 바뀐 친구들에게는 배달되지 못하고 돌아 오곤 합니다. 그러나 연세가 아흔이 넘은 한국전 참전 용사에게 보낸 달력이 되돌아 오면 가슴이 쿵 내려 앉는 듯한 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대부분은 세상을 떠나 버린 주인없는 우편물이 되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금년 연말에는 엘렌 스미스에게 보낸 달력이 되돌아왔습니다. 엘렌은 나이 열 아홉에 미군에 입대하였고 훈련이 끝나자 바로 한국 전쟁터로 파병된 파병 용사였습니다. 그는 모진 한국 겨울 추위와 싸우면서 용감하게 중공군과도 맞서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부대 근처에서 추위에 떨고 서있던 어린 한국 아이를 발견하였습니다. 따뜻한 음식을 그에게 먹여 돌려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동료들 중에는 전사한 군인들도 적지 않았지만 엘렌은 무사히 한국 전쟁이 끝난 후 미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그는 제대 후 연방 정부의 배려로 우체국에서 일할 자리를 얻었습니다. 일흔 살에 은퇴하기까지 성실하게 미 연방 정부의 체신부 공무원으로 일하며 아담한 집도 마련하고 결혼도 하였습니다. 한국에서 겪은 전쟁의 참혹함을 평생 마음에 간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한국 파병을 후회하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이곳으로 오는 유학생이나 한국 가족을 만나면 그는 자기 집으로 초대하고 음식을 대접하기를 즐겨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한국사람들을 집으로 오게하여 생활 영어를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엘리스는 한국 전쟁 참전 용사를 위한 음악회를 개최할 때 마다 항상 일찍 도착하여 앞자리에 앉아서 힘찬 박수를 치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음악회 때는 두툼한 사진 첩을 들고 왔습니다. 사진들은 한국 전쟁 중에 찍은 사진들이었습니다. 지프를 타고 엄지 척을 한 모습, 완전 무장을 한 모습, 내무 반 생활을 담은 사진 등 오래 되어 빛 바랜 사진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는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딸은 아버지가 한국 전쟁 참전 용사임을 늘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지난 24년 동안 그는 한국전 참전 용사들을 위한 연례 음악회에 한번도 빠짐없이 참가해 주었습니다. 음악회가 끝나면 우리는 푸짐한 한국 음식들 -갈비, 불고기, 잡체, 김치 등 우리 고유 음식을 장만하여 상차림을 하였습니다.
백발이된 노인들이 한 때 대한민국을 공산군으로부터 구하기 위하여 파병된 젊은 군인이었다는 것이 믿기워 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훈장을 가슴에 달고 나타난 노인들을 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금년 연말에도 달력을 보내었습니다. 두 주가 지나자 되돌아 온 달력이 있었습니다.
급히 주소와 이름을 보았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엘리스 스미스였습니다. 다시 한번 확인을 하였습니다. 여전히 그 이름과 주소였습니다.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습니다. 비교적 다른 노인들에 비하면 건강하였고 항상 밝은 웃음으로 음악회에 가장 먼저 찾아 주곤 하였던 사랑하던 엘리스에게 보낸 달력이 되돌아 오다니, 믿기워 지지 않았습니다.
그 연세에 이사 갈 일도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난 것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해 음악회 초청장 명단에서 그 이름을 지우기 위해서 주소록을 꺼내었습니다. 지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멍하니 그 이름위에 시선을 두었습니다. 금방이라도 달려와 음악회장 맨 앞줄에 앉을 것만 같은 마음을 한참동안 지울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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