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박보라] 스팽글 드레스를 입은 브람스
- 22-11-28
박보라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스팽글 드레스를 입은 브람스
공짜 표가 생겼다. 브람스를 만나러 간다. 낮 동안 비 내린 시애틀 거리는 사람들의 표정만큼이나 축축하게 젖어있다. 서두르는 구두에 찰박찰박 소리가 붙는다. 스타 연주자의 시애틀 공연이라 그런지 연주 홀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간만에 느끼는 인파 속에서 묘한 불안감이 든다. 동행을 잃어버릴까 봐 얼른 손목을 잡아챈다.
연주 홀은 청중들로 금세 가득 찼고, 젊은 층이 많다는 점이 좀 의외였다. 클래식을 사랑하는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 도시라니, 시애틀이 갑자기 19세기 유럽의 한 도시 같다는 착각이 인다. 잠시 후 조명이 어두워지고, 무대 위 오케스트라 단원들 앞으로 지휘자가 힘차게 걸어 들어온다. 그리고 드디어 스타 연주자가 무대 위에 등장했다. 청중들은 모두 의자에 기댔던 허리를 곧추세우고 귀와 눈을 온전히 그녀의 바이올린 연주에 바짝 갖다 붙인다. 화려하고 힘 있는 그녀의 연주. 그런데 왠지 모르게 서운하다. 그녀의 드레스에 붙은 스팽글 장식이 조명에 화려하게 반짝인다.
다른 집 엄마들이 모차르트의 자장가를 불러줄 때, 우리 엄마는 늘 브람스의 자장가를 불러줬다. 이모 집이 있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2년 동안 살다 온 탓도 있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브람스의 출생지가 그와 같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난 독일, 특히 함부르크의 분위기를 잘 안다. 조용하게 가라앉은 너른 들판은 공기조차 탁색을 입는다. 마치 독일인 같다.
물론 독일인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가 흔히 민족성이라고 부르는, 그 나라만의 색과 분위기가 있다. 한국인이라 하면 빠르게 움직이는 습성과 세련된 외모를 가장 먼저 머릿 속에 떠올리는 것처럼 독일인을 생각할 땐, 검소한 옷차림과 조금은 재미없는, 심각한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래서 독일의 음악과 문학은 매우 깊이가 있다. 그들은 책을 많이 읽고 인간의 문제나 정치적 이슈, 환경 관련 문제 등에 대해 저마다의 깊이 있는 생각을 갖는다. 그들의 음악에서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무게감이 느껴진다. 한 음을 고치고, 고치느라 종이를 여러 장 덧대어 붙였다는 베토벤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스트라빈스키가 브람스의 색을 회색이라고 말했던가. 나 또한 그의 말에 동의한다. 그의 곡들은 하나같이 탁색이 깔린 함부르크의 너른 들판을 떠오르게 한다. 좁은 흙길로 큰 개와 함께 산책하는 탁색을 입은 심각한 독일인이 보인다. 그리고 그 길 어딘가의 작은 벤치에 앉아 손바닥만 한 책을 꺼내어 진중하게 읽고 있는 독일인도 보인다. 우중충하게 내리는 작은 빗방울 속에서도 뛰지 않고 둔탁한 발소리를 내어 걷는 독일인, 단순하고 규칙적인 삶을 즐기는 다소 딱딱한 분위기의 독일인도 그 안에 모두 섞여 그들의 특성에 굵은 선을 긋는다.
스타 연주자의 연주가 모두 끝나자 청중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일제히 소리치며 박수를 보낸다. 그녀는 몇 곡의 앙코르곡을 더 연주하곤 무대를 떠났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화려한 드레스가 반짝이를 잔뜩 쏟아놓는 것 같다. 그 후에 연주곡이 더 남아 있었지만, 청중의 일부는 연주 홀을 나가버렸다. 불편하다. 아무래도 그들은 스타 연주자를 만나러 온 것 같고, 난 브람스를 만나러 와서 그런가 보다. 그렇다고 브람스다운 브람스를 만나지도 못했으니 난 여전히 서운하다.
만져지지 않는 음들을 일일이 귀로 잡아 가슴에 박는다. 스팽글 장식 대신 빼곡히 박힌 브람스의 음들이 긴 회색 꼬리를 달고 공중으로 떠오른다. 그건 바닥을 힘있게 박차고 오르는 게 아니다. 검은 구두가 살짝살짝 바닥에서 떨어져 오르지만 그다지 높지 않게 들판을 비행한다. 탁색의 깊은 고민과 생각들을 꼬리로 달고 차분하고 느리게 움직인다.
스타 연주자의 공연이 어땠는지 누군가 내게 묻는다. 난 단답형으로 대답한다. ‘미국적인 브람스’라고. 그건 마치 아리랑을 부르며 화려한 스팽글 장식의 드레스를 펄럭이는 것과 같고, 힘차고 화려하게 수많은 꾸밈음을 넣은 것과 같다고 말끝에 덧붙인다.
물론, 모든 연주는 연주자의 재해석이 가능하다지만, 난 아직도 그 본연의 모습이 그립다. 군더더기를 넣지 않은 회색의 브람스가 여전히 좋다. 그래서 편안히 독일 함부르크의 이름 모를 흙길을 걷고, 그러다가 작은 벤치를 만나면 그곳에 앉아 손바닥만 한 책을 읽고 싶다.
연주 홀을 나와 다시 시애틀의 거리를 걷는다. 비가 그치자 축축하게 젖은 콘크리트 위에 알록달록한 불빛이 반짝인다. 그 화려한 불안감에 동행의 손목을 잡아챈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시애틀 뉴스/핫이슈
한인 뉴스
- 한국 스타트업 미국진출 위해 중진공·시애틀총영사관 협력
- 시애틀시 ‘6월4일 한국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의 날’로 지정
- 6월 정부납품 세미나 이번 주말 열린다
- 시애틀 한인, 워싱턴주 EOC 커미셔너로 활동
- “시애틀 한인 여러분, 유언장이나 상속 문제는 이렇게”
- 한인 꿈나무들 학예경연대회로 그림ㆍ글 실력 맘껏 발휘(+영상,화보)
- 페더럴웨이 통합한국학교도 장날행사로 여름방학들어가(+화보)
- 벨뷰통합한국학교 풍성하고 즐거운 종업식(+영상,화보)
- 시애틀통합한국학교 신나는 장날행사로 방학 들어가(+화보)
- U&T파이낸셜, 워싱턴주 한인여성부동산협회 세미나 성황
- 워싱턴주음악협회 올해 정기연주회 젊고 밝고 맑았다(+영상,화보)
- FWYSO 2만4,600여달러 장학기금 모았다
- [신앙과 생활-김 준 장로] 김철훈 목사 소고(小考-4)
- KORAFF 한인입양가족재단 한국문화축제 연다
- 타코마한국학교, 특별한 한국어 여름학교 캠프 연다
- KWA대한부인회 평생교육원 봄학기 수료식
- UW 한인 이수인교수 삼성호암상 받았다
- [하이킹 정보] 시애틀산우회 1일 토요정기산행
- [하이킹 정보] 워싱턴주 시애틀산악회 2박3일 캠핑
- [하이킹 정보] 워싱턴주 대한산악회 1일 토요산행
- <속보>아동성폭행 타코마 한인군인, 택시기사 살해혐의로도 기소돼
시애틀 뉴스
- 워싱턴주 학생들 아직까지 FAFSA 결과 통보 못받아 전전긍긍
- 워싱턴주 오늘부터 범죄용의차량 추격 다시 가능해져
- 오늘, 내일 시애틀지역 바닷물 올해들어 가장 많이 빠진다
- 워싱턴 주민 "도살업자가 엉뚱하게 우리집 애완돼지 죽였다"
- 시애틀지역 평균 집값 100만 달러 돌파했다
- UW 순위 다소 밀렸지만 세계 명문대 맞다
- "시애틀지역에서 저렴한 탁아소 어디 없을까요"
- 시애틀 말썽꾸러기 ‘벨타운 헬캣’ 운전자에 거액벌금 요구
- 미국 항공사 요금반환법 제정엔 시애틀 고교 영향도 컸다
- 시애틀 역사풍물인 길거리 시계 ‘부활’한다
- 워싱턴주 경제 미국서 최고로 좋다
- MS, 스웨덴 AI·클라우드 인프라에 2년간 32억 달러 투자한다
- 긱하버 퍼레이드행사서 급발진해 5명 부상(+영상)
뉴스포커스
- '김정숙 순방 기내식' 6292만원 중 4125만원 '운송·보관료'
- 아브레우 액트지오 고문 "포항 석유·가스 유망…전 세계 주목"
- 서울대병원이 쏘아올린 '집단휴진', 동네 의원까지 확산할까
- '첫 파업' 삼성 노조, 연가 투쟁 참여율 낮아…생산 차질 없을 듯
- 도종환 "못 참겠다, 이게 공식 초청장…호화 기내식? 50명이 같은 도시락"
- '울산판 전청조' 남성 5명 동시 교제하며 수십억원 뜯어
- 이재명·조국, 2시간 비공개 회동…'22대 국회 협력 방안' 모색
- '현충일 욱일기' 부산 의사, 결국 내렸다…성난 민심 '신상 공개' 돌진
- 페이커 이상혁 "돈·명예 한시적…선한 영향력 고민하고 실천하겠다"
- 美도 놀란 '필름형' 조현병치료제…CMG제약 “이번엔 FDA 벽 넘는다”
- 서울대병원 17일부터 전면 휴진…응급 제외한 외래·수술 중단
- "맘에 들지 모르지만 핸드백 장만"…최재영 카톡 내용 공개
- 전공의 사직서 받는 정부…의대생 '휴학계'도 받을까
- 탈북자 단체, 북한에 '임영웅 노래' 보냈다…전단 20만 장 살포
- 김정숙 인도행 동행 고민정 "나도 그 기내식 먹었다, 엄청났다 기억 없어…"
- 한일 국민소득 '절반→역전'까지 18년…1인당 GDP도 추월 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