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염미숙] 무엇이 되어
- 22-11-13
염미숙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무엇이 되어
오래 전 미국 생활을 시작하면서 남편의 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로마법이려니 하고 저항감 없이 받아들였다. 후에 그 이름으로 페북 계정을 만들었다.
새로운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었을 뿐, 가뜩이나 바쁜 일상에 페북 활동까지 더할 필요는 없었다. 젊은이들이 그들만의 공간을 원해 페북으로 모인다고 들었다.
누구의 딸로서가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내야 할 자녀들의 삶이니 거기까지 쫓아가지는 말자고 생각했다. 십 대였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고, 지금은 또 다른 인터넷 공간으로 자리를 옮긴 지 오래다. 이름만 붙여놓은 페북 속 내 방엔 아무도 살지 않았다.
수필을 쓰기 시작하면서 원래 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남편은 좀 서운해했지만, 글쓰기란 ‘나’라는 사람의 정체가 바탕이 되는 일이니, 본래의 나에서 시작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나로 살기로 했다는 거창한 선언이 아니어도 좋았다.
다시 찾은 이름과 시작한 걸음으로 나는 나를 조용히 들여다보고 생각을 정리하여 진일보했다. 또 나를 위로하게도 되었으니 나와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최근에 알게 된 분이 있다. 대화 도중에 그녀가 불쑥 말했다. 나를 만나니 인상이 비슷한 사람이 떠오른다고. 중학교 때 만난 교회 학생회 교사였는데 꼭 다시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녀가 그 교사의 이름을 말했을 때 머릿속에서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가깝게 지내던 대학 후배의 이름이었다. 그녀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맞추어보니 딱 맞았다. 예상치 못한 해우였다.
우리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후배와 연락이 닿았다. 그녀는 나보다 먼저 미국으로 유학 왔고 미국인 남편을 만나 플로리다에 살고 있었다. 철학의 미로에 서 있던 그 대학생은 어디로 가고 그녀는 훌쩍 자라있었다.
선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로 유익한 일을 벌였다. 통화할 때마다 전화기 너머에서 기쁨의 에너지가 흘러나왔다. 그 후 몇 해 동안은 가끔 통화하며 지냈지만, 소식이 끊긴 지 벌써 오래였다. 나도 그녀의 소식이 궁금했다.
여러 모로 궁리했지만, 그녀를 다시 찾는 건 어려웠다. 그녀의 페북 계정은 남편의 성으로 되어 있을 것이고 내 오래된 페북 계정도 남편의 성으로 되어있었다. 우리는 미국 땅에서 하나씩 새 정체를 만들며 살아간다. 아내, 엄마, 직장 동료, 이웃. 그 이름들이 부여한 역할로 삶을 채워간다. 지금의 나는 누구일까. 무엇이 나를 일컫는 대명사일까. 통화하며 지냈던 때로부터 벌써 10여 년의 세월이 더 지나갔으니 그녀는 또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까?
혹시 그녀가 나를 찾아줄까 기대하며 본래의 이름으로 새 계정을 열었다. 종종 들어가 친구 신청자의 이름을 확인해보았다. 많은 얼굴들이 소개되었지만, 그녀는 없었다. 어느 날 페북이 친구로 추천한 명단을 살피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남편의 성을 가진 옛날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친구 신청을 했다. 페북이 명석한 줄 알았더니 영 아니었다. 아. 그리고 다음 순간, 어쩌면 그 둘은 다른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훌쩍 변했던 그녀처럼, 나도 그간 많이 변했다. 얼굴엔 주름이 늘었고 꽉 찬 스케줄로 단거리 선수처럼 살던 때와 달리 지금은 여유와 감사가 늘었다. 나의 한계를 인정하는 일이 쉬워지고 소중한 시간이나 아름다움을 알아채는 시력이 자랐다.
때론 오늘의 나도 낯설 때가 있지 않은가.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한심한 모습이 바로 나라는 걸 발견하는, 숨고 싶은 순간이 있다. 역시 페북이 한 수 위였다.
망망한 페북의 바다에 미끼를 던지고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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