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공순해] 돌아가는 가을에게
- 22-10-17
공순해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돌아가는 가을에게
수직 강하하는 가을이 가슴으로 내려꽂히는 순간은 침대에 누워 있을 때다. 며칠째 몸이 혼곤해 침대 신세를 지고 있었다. 마주치는 창엔 가득 찬 하늘밖엔 보이지 않아 그 무변함에 가슴이 울컥했다. 서럽기조차 해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반전이 일어났다. 그쪽 창엔 전혀 다른 그림이 가을이 되어 걸려 있었다. 점 점 점 흩날리는 적(赤), 황(黃), 녹(綠). 공중으로부터 가을이 땅 위로 내려 차곡차곡 쌓이는 중이었다.
가장 호사스러운 기분이 느껴질 때는 언제일까. 누워서 창밖의 흔들리는 나무와 하늘을 바라볼 때가 아닐지. 각각의 소임을 다하고 각자의 색깔로 떨어져 내리는 잎들, 색채의 그늘이 무엇보다 감명을 불러일으켰다. 살아가며 존재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느껴 볼 수 있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다. 하기에 그런 한가한 시간에 대한 감동이 축복처럼 느껴졌다.
낙엽에 묻혀, 대지 위에 누운 듯한 느낌으로 흩어져 내리는 허공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문득 그 색채들이 익숙하게 느껴진다. 신비한 색채에서 환희까지 느껴지는데 저런 색채를 누구에게서 느꼈지? 머리를 비집고 떠오른 건 클림트였다. 환희와 신비, 매혹의 색채를 부리던 오스트리아의 화가. 창밖의 풍경이 매혹적이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는 걸 깨닫자 혼자 함소(含笑)했다. 그 순간 침대는 딴 세상이 됐다. 가을이 숨 막히게 다가왔다. 조용히 숨만 쉬고 있어도 신비로웠다. 우주로부터 오는 선물을 받으며 물에 둥둥 떠 있던, 밀레이 그림 속의 <오필리아>가 된 느낌조차 들었다. 순간 가을을 찾아 나서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자연의 작업에 동참하지는 못할망정 직접 알현이라도 하고 싶었다.
일요일, 예배가 끝나고 차 머리를 동네로 향하게 했다. 동네를 돌고 다른 동네도 돌았다. 서머셋 지역의 하이랜드 오솔길에 깊은 가을이 고여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동안 저처럼 가을이 깊었던 걸 몰랐구나. 내가 부재(不在)해도 자연의 작업은 쉼이 없구나. 어김없이 일하시는 분의 성실함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그 길의 화가는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을 부양하시는 그분이었다. 그분은 팔레트에 가을의 여러 가지 색을 섞어 열심히 색을 칠하고 계셨다. 클림트가 금을 섞어 캔버스 위를 풍부하게 했다면 그분은 보이지 않는 물감, 빛을 섞어 누구도 모방할 수 없게 하고 계셨다.
빛이 투과한 나뭇잎들은 잎맥이 보일 정도로 투명하게 반짝거렸다. 바람에 반응하며 손을 흔들 듯 기쁘게 흔들렸다. 그 빛을 받아 이미 푸르죽은 다른 나무들조차 빛나 보였다. 한 그루 나무가 되어 한 해의 열매 색깔을 입고 가을을 들이마시는 순간, 장엄함에 압도되어 말을 잃었다. 소성(蘇醒)되어 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한밤중 눈을 떴다. 전기가 나갔는지 침대 속이 차다. 바람 지나가는 소리도 들렸다. 어느새 전령사의 도착이구나. 가을을 수거해 갈 사자(使者)가 오고 계시나 보다. 아침에 커튼을 올리자 놀라운 광경과 마주쳤다. 앞쪽의 노란 단풍이 남김없이 가고 없다. <마지막 잎새>의 화가에게 마지막 잎새를 그려 놓도록 예약이라도 할 걸 그랬나. 주시는 분도 가져가시는 분도 동일한 분. 뒤쪽의 붉은 단풍만 이 빠진 아이처럼 파리한 낯빛이 되어 흔들리고 서 있다. 현실로의 복귀였다.
잔치는 끝났더라, 빠알간 불사르고, 재를 남기고. 일어서서 주인에게 인사를 하자. 우리 모두 다 돌아가는 사람들… 서정주의 <행진곡>으로 가을을 작별하게 될 줄은 몰랐다. 소멸의 미학 탓인가? 그러나 만물을 부양해 주시는 분은 회복도 부어주신다. 바람에 난타당한 가을은 갔지만 어느 들판, 또는 어느 거리, 어느 모퉁이에 뒹굴 잎들은 겨울을 지나며 깨끗하게 탈골돼 돌아올 봄의 재가 되고 거름이 될 것이다. 새로운 생명의 싹을 틔우겠지. 가을이 충만했으므로 봄도 풍요롭겠지.
이처럼 올가을도 79억 개 각자의 가을로 시간의 켜를 남기고 돌아가는 중이다. 가을이 죽고 봄은 다시 태어날 것이다. 올해를 클림트의 색깔로 공급해 주셨으니 내년엔 또 어떤 모양으로 가을을 공급해 주실까.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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