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대란' 유럽은 어쩌다 러시아산 가스의 인질이 되었나

 북해 가스전 꺼지며 자급자족 어려워져…탄소 중립 정책에 가스 의존도 증가

 

에어컨 기온은 섭씨 27도 이상에 난방은 섭씨 18도 이하. 오후 10시부터는 조명이 꺼지는 공공건물. 스페인의 얘기다.


이탈리아에서도 공공건물의 냉방 온도는 섭씨 25도 이상, 난방 온도는 섭씨 21도 이하로 제한됐다.


독일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공공기관 사무실의 경우 난방은 섭씨 20도까지 가능하고, 겨울철 화장실에선 온수가 공급되지 않는다. 밤에는 베를린 전승기념탑, 샤를로텐부르크 궁전, 유대인 박물관 등 공공장소와 랜드마크 주변의 약 1400개 조명은 꺼진다.


특히 독일 에너지 비교 사이트에 따르면 독일 가구의 연간 가스사용액은 지난해 평균 1301유로(약 175만원)에서 올해 3991유로(약 536만원)으로 3배 이상 늘 것이라는 경고까지 나온 상태다.


유럽 각국 국민들이 에어컨과 히터조차 마음대로 틀지 못하게 된 건 다름 아닌 러시아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의 대(對)러 제재에 대한 반격으로 러시아가 가스관을 수시로 잠그며, 겨울철 에너지난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꼽히는 유럽 국가들은 왜 러시아의 가스에 이렇게까지 의존하게 됐을까.



◇북해 가스전 꺼지며 '자급자족' 불가


CNBC보도에 따르면 1960년대와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유럽 국가들은 천연가스를 자급자족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북해 가스전이 고갈하기 시작하면서 주요 생산국이었던 영국과 네덜란드의 가스 생산량은 크게 감소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EU는 2050년까지 탄소 중립을 달성하기 위해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최소 55% 감축하겠다고 발표했고, 이를 위해 석탄 의존도도 낮춰왔다. 현재 EU의 전력 생산에서 석탄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20% 수준이다.


게다가 독일은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자력 의존도도 대폭 줄였다. 독일은 현재 남아있는 3개의 원자력 발전소도 올해 말 가동을 중단할 예정이다.


EU에너지 사무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EU국가의 에너지 소비 중 약 25%는 천연가스다. 천연가스에 대한 의존도는 곧 러시아에 대한 의존을 뜻한다.


EU는 세계 최대 천연가스 수입국인데, 러시아에서만 41%를 수입한다. 그 다음으로 노르웨이에서 24%, 알제리에서 11%가량을 들여오고 있다. 지난해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수송된 천연가스는 약 1550억 입방미터(㎥)에 달한다.



◇유럽 덮친 가스 대란…독일이 직격탄 맞은 까닭은 


독일의 경우 50년 넘게 러시아로부터 가스를 공급받고 있다. 독일의 가스 수입은 1970년대부터 꾸준히 증가해왔다고 독일 공영 도이치벨레(DW)는 전했다. 1970년대 중반 석유 파동이 일어나며 독일과 같은 국가들은 에너지원으로서 천연가스로 눈길을 돌리게 됐고, 러시아는 더욱 영향력을 확장해왔다는 분석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무렵 당시 소련은 서독의 가스 수요 중 약 3분의 1을 공급했다. 독일에 대한 러시아의 가스 공급량은 1973년 11억 입방미터에서 1993년 257억 입방미터로 급증했다.


이처럼 독일의 러시아산 가스 수요가 증가하자 러시아 국영 에너지기업 가스프롬은 1990년대부터 유럽으로 향하는 가스관 건설에 열을 올렸다.


러시아의 대유럽 수출 가스관은 현재 6개다. 우크라이나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가스관은 '소유즈'(1980년 가동/2750㎞)와 '우렌고이-포마리-우즈고로드 가스관'(1984년 가동/4451㎞) 등 2개다. 가스는 우크라이나를 지나 주로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이탈리아 및 기타 동유럽 국가로 이동한다.


소련 해체 후 러시아는 안정적인 유럽 가스 수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4개의 가스관을 추가로 개통했다. 벨라루스와 폴란드를 경유하는 '야말-유럽'(2000년 가동/2000㎞), 흑해 해저를 지나 러시아-터키를 연결하는 '블루스트림'(2003년 가동/1213㎞)과 '터키스트림'(2020년 가동/930㎞), 발트해 해저를 지나 러시아-독일을 연결하는 '노르트스트림'(2011년 가동/1224㎞) 등이다.


러시아는 지난해 9월 노르트스트림2(1200㎞)를 완공해 가스를 주입했으나, 지난 2월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승인 절차가 중단됐다.



◇2000년대부터 에너지 안보 위기…대안 마땅치 않아


미국 측에서는 1960년대부터 에너지 안보를 두고 우려를 표해왔다. 이 같은 우려는 2000년대 들어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천연가스 가격 등을 두고 우크라이나와 갈등을 빚던 러시아가 2006년과 2009년 우크라이나로 가는 가스관을 돌연 걸어 잠근 것.


두 차례의 에너지 위기에도 불구하고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산 가스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보다는 외교적 해법을 모색해왔다.


MIT의 팀 Schittekatte 연구원은 CNBC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산 가스가 가장 저렴했다"며 "유럽 국가들은 가스 수입국을 다양화하기보다는 러시아산 가스를 들여오는 경로를 다양화했다"고 설명했다.


현재도 유럽 국가들은 올겨울을 넘길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는데, 지난 역사를 반면교사 삼아 에너지 대란 장기화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질 않고 있다.


DW는 "EU국가와 러시아의 관계처럼 러시아산 가스 수입과 관련된 미래는 매우 불확실해 보인다"며 "우크라이나 전쟁은 죽음의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가스 소비를 줄이는 것 외에 뾰족한 대안은 없는 상태다.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은 단기간 내에 달성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원전마저 장비 노후화와 안전 점검 등으로 인해 재가동까지 시간이 다소 소요되기 때문이다.


유럽의 경제정책 싱크탱크 브뤼헐(Bruegel)도 "EU는 단기적이더라도 러시아산 가스의 흐름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며 "탈원전 지연, 산업 가스 수요 감소 등으로 가스 소비를 줄이는 현실적인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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