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경의 촉] 마흔에 불쑥 사표, 시애틀로…"은퇴? 자유롭게 일해 행복해요"

기자 그만두고 미국서 귀촌 김선우씨…"느리고 자그마한 삶"

"'회사노동'서 은퇴하려면 소비 줄여야…정신적 풍요 늘었다"

 

고인이 된 한국의 한 성공한 기업가는 일요일 저녁이면 짜증을 내곤 했다고 한다. "왜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는)월요일이 빨리 오지 않는 거냐"며. 산업화 시대 역군으로서, 또 역군들을 이끌며 한국 경제의 고속 성장이란 배경 속에서 활약하던 그의 이런 일화는 한때 값나가게 회자됐다. 세상의 많은 '월요병' 환자들은 기함할 노릇이지만. 일에 모든 자아를 쏟아부었던 그는 근면과 성실, 그리고 일에 대한 몰입이 가장 중요했던 시대를 아주 잘 탔고, 성공할 수 있었다.


이제는 개선과 혁신으로 늘어나는 총요소생산성(Total Factor Productivity)이 근면·성실보다 어쩌면 더 중요해졌고, 일과 개인생활의 고른 분배, 이른바 '워라밸'도 중요한 삶의 기준이 됐다. 그러나 어쩐지 일은 하면 할수록 더 늘고 벌이가 딱히 느는 것 같지도 않다. 버나드 쇼는 "네가 돈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면, 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했다지만 과거보다 훨씬 오래 살아야 하니 돈의 소용(所用)도 더 중요하고 은퇴란 마치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용감한 '이탈자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참으로 속되게도 솔깃했다. 일찌감치, 한창 한 분야에서 고숙련 노동자가 되어 자신감 넘치게 달릴 만한 나이에 과감하게 정규직 레일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먹고살 일을 스스로 만드는 한 부부의 이야기가. 

부부는 둘 다 한국에서 바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신문기자를 하다가 40대가 되기 전에 그만 두었다. 지금은 미국의 시골에서 아이 둘과 느린 삶, 대체로 언택트 라이프(untacted life)를 산다. 지나치게 검박하진 않아도 꽤 미니멀한 삶이다. 생업의 포트폴리오는 흥미롭다. 농부이자 수상안전요원이고 작가와 번역가이기도 하며 때론 빵가게 주인이기도 하다. 

그들은 지금을 행복에 가까운 삶이라 여기는 것 같다. 책 속 표현대로라면 '편리하고 폼 나고 수많은 가능성의 문을 열어두는 삶도 좋지만 이제는 조금 불편하더라도 단순하고 변화가 없으며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 더 좋다'고 하니까. 

이런 이야기를 책 <40세에 은퇴하다>에 이어 <지속가능한 삶을 모색하는 사피엔스를 위한 가이드>로 쓴 남편 김선우씨에게 연락을 했더니 늦지 않게 답이 왔다. 부인 박혜윤씨도 인터뷰에 동참해 이야기는 더 깊어졌다. 스카이프 영상 통화와 이메일 등을 통해 소통했다.

다음은 주고받은 이야기다. 

◇번아웃, 몸도 맘도 지쳐 충동적으로 사표…강북 아파트 팔아 미국으로

-대부분의 한국 직장인들은 이런 과감한 선택을 꿈꿀 순 있어도 실천은 잘 못한다. 40세에 은퇴하겠다는 결행을 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힘은 무엇이었을까.

▶ 대단한 계획이 있어서라기보다 솔직하게 번아웃이 왔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먼저 직장을 그만두고 미국에 박사 공부를 하러 첫째와 떠났고 저는 둘째와 서울에 살고 있었다. 떨어져 사는 것이 힘들어 1년 휴직을 하고 미국에 들어가 같이 살며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따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일을 그만 둔다는 생각을 못했고 서울로 돌아와 4년 더 기러기 생활을 하며 신문기자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도저히 이렇게는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가족이 다 같이 살고 싶었고 몸과 마음도 지쳐 있었다. 그때 나이가 딱 40세였다. 충동적으로 사표를 내고 미국으로 떠났다. 기자란 일을 좋아했지만 사표를 쓸 때엔 지금 잡고 있는 줄을 놓아야 다른 줄을 잡을 수 있단 것만 생각했다.  

-가족과 합친 이후엔 무엇이든 일을 할 계획이었던 건가.

▶ 처음엔 그랬다. 박사 공부를 하던 아내가 교수가 될 거라고 은근히 기대도 했다. 그래서 1년 정도는 아이들과 푹 쉰 뒤에 일을 다시 할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되겠지'란 다소 한가한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막상 일을 시작하려니 계획대로 되는 건 없었다. 한국말로 기사만 쓰던 40세 동양인 남성을 써주는 정규직 일자리는 없었고 심지어 작은 가게 인턴 지원에서조차 떨어졌다.

게다가 놀랍게도 아내는 교수 할 생각은 전혀 없다며 귀촌을 제안해 왔다. 신문사 시절부터 아내는 헬렌·스콧 니어링 부부의 책 <조화로운 삶>을 보여주며 "우리도 이렇게 살자"는 얘길 했었다. 그 때는 "무슨 얘기냐"며 흘려 들었는데 어쩌다 보니 아내의 제안 이후 우리의 삶도 그렇게 가게 됐다. 아내는 '쇠뿔도 단김에 빼자'는 스타일이어서 그 말이 나온 후 마치 린 스타트업(Lean startup) 전략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그사이 농장에서 인턴을 구한다기에 지원해 봤지만 떨어지기도 했고, 인턴이 됐지만 육체노동이 힘들어 고작 한 달만에 그만두기도 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기본 자본이 있어서 먹고살 것을 걱정하지 않고 시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 한국에서 강북에 갖고 있던 아파트를 팔았다. 그걸로 시애틀 인근에 주택을 하나 샀고 나머지로 차로 한 시간 정도 더 떨어져 있는 시골에 땅을 샀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발(發) 금융위기로 미국의 부동산 가격이 말도 안 되게 내렸을 때라 가능했다. 집은 허름하긴 하지만 조립식으로 마련했기에 돈이 별로 안 들었다.

-불안하고 걱정스럽진 않았나.

▶ 물론 불안했다. 그리고 저는 보통사람이라 미련도 적지 않았다. '회사 노동자'로서 조직 생활을 하는 걸 즐기기도 했고 어느 정도 소비도 하고 도시 문화도 즐기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서울에서의 생활이 그립기도 했다. 지금도 어느정도는 그렇다. 인정 욕구를 버리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이제는 귀농한 선택을 받아들이고 즐길 수 있게 됐다. 마음이 전체적으로 편안해지기까지 수년이 걸렸고 시행착오도 많았다.

◇농부·수상안전요원·빵가게 주인·번역가·작가…원하는 만큼만 일하는 삶

-'은퇴'란 표현을 썼지만 사실상 은퇴는 아닌 것 같다. 지금 생활을 위해 하는 일은 무엇인가.

▶ 처음엔 은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살다보니 여러가지 일을 하게 됐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은퇴는 아니다. 무리하게 일에 중심을 두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만큼'만 일을 하는 삶이라고 보시면 된다.

일단 농부란 타이틀을 걸고 있다. 하지만 대규모 농사를 지어 농산물을 판매해 돈을 버는 일은 아니다. 자급자족할 정도다. 처음엔 농사 일을 제대로 해 볼 생각이긴 했다. 그런데 농사 지은 걸 사슴들이 와서 다 먹어버리고 망쳐 놓더라. 담을 올릴까 했더니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포기했다. 농사는 우리가 먹고 살 만큼만 하자고 마음을 접었다. 다만 이곳의 날씨가 봄·여름엔 좋아서 '수렵채집'할 것이 많다. 버섯과 쐐기풀, 고사리, 베리류 등을 열심히 따면 1년 내내 먹을 수 있는 양이 나온다.  

운동을 좋아해 수영을 하겠다고 했더니 아내가 "돈이 든다"며 못 하게 했다. 그래서 찾은 일이 수상안전요원이다. 공짜로 수영할 수 있는 일이니 일석이조다. 2년 근속하면 온 가족 무료 이용권도 나온다. 이 일을 일주일에 약 15시간 정도 한다.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일이다.

일주일에 15시간 수상안전요원으로 일하는 김선우씨(사진=김선우씨 제공) © 뉴스1


최근 1년간은 빵을 구워 팔기도 해 봤다. 잘 팔리진 않았다. 맨날 남아서 고객들에게 덤으로 주는 게 더 많을 정도였다. 1년 동안만 해보자고 한 일이었는데 재밌게 했다. 그 외에 글을 쓰는 일을 여전히 좋아하는데 기회가 되어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를 한국어로 번역하고 있고 인터비즈란 매체에 글을 정기적으로 쓰며 책도 썼다. 그 외의 시간은 다 남편이자 두 딸의 아빠로 산다.  

부인 박혜윤씨는 블로그에 "우리에게 은퇴란 정기적인 임금노동에 종사하지 않고 우리가 하고 싶은 일, 삶을 충만하게 하는 것만으로 생존할 수 있는지를 테스트해보기 위한 것이었다.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면 복귀해야지 했는데 남편 은퇴 후 7년째 그런 생각은 안 든다"고 했다. 이들이 시도한 프로젝트는 일단 성공인 것이다.

◇인터넷 없이 살기도…소비 줄이는 것도, 돈 버는 것도 '프로젝트'

-집에서 인터넷도 끊었다고 하던데.

▶ '없이 살아보자'고 마음 먹은 것들이 있었다. 그중에 TV와 인터넷, 스마트폰도 있었다. 지금 폴더폰을 쓰는데 꺼내 쓸 때 잠깐 사람들의 눈에 뜨이는 것일 뿐 크게 불편한 건 없다. 연락할 사람들은 다 찾아서 연락하더라. 평소대로라면 하루 중 정해놓은 시간에 도서관에 가서 인터넷을 쓸 텐데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아이들이 원격수업을 하느라 집에서도 인터넷을 쓰고 있다. 도서관에서 일정시간 인터넷을 이용할 때엔 온/오프가 확실히 되어 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느꼈는데 집에서도 인터넷이 되니까 자꾸 더 이용하게 되고 그것 때문에 오히려 기분이 나빠질 정도다. 다만 이 때문에 한국에서 들어오는 일은 더 생기는 것 같다. 줌, 스카이프 등으로 영상통화를 하니까 출판사나 매체와의 협업이 더 원활하게 된다. 

-생활비는 어느 정도 드나. 한국에선 은퇴 얘기를 하려면 '얼마가 필요할지' 자금에 대해서부터 얘기하게 된다.  

▶ 한국 기준으로는 약 100만원 정도가 든다. 소비를 많이 줄이는 게 이 생활의 포인트다. 옷이 필요하면 중고가게에서 사서 입는다. 식재료를 제외한 다른 물건들도. 이렇게 살면 지금 하고 있는 일로만도 생활은 충분하다.

-소비를 많이 줄인다는 게 말처럼 쉽진 않았을 텐데.

▶ 소비를 줄이는 것도, 돈을 버는 것도 하나의 '프로젝트'로  생각하고 하니까 힘들지 않다. '설탕을 줄여볼까' '전자레인지를 없애볼까'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시도해 보고 필요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기도 한다. 빵도 잘 팔아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하는게 아니라 팔 수 있을 정도로 구워보자는 시도였다. 그렇게 하니 '할 수 있는 일'도 늘고 일에 대한 완성도도 높아지더라. 이렇게 살다보면 정신적 풍요가 크게 는다. 정신적 풍요가 늘면 물질적 풍요는 상대적인 것일 뿐이라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또 아이들이 한국에 있었다면 학원 보내느라 돈이 많이 들었을 텐데 여기선 그렇지 않으니 크게 돈 들 일이 없다.

◇아이들, 공부 대신 '강철같은 정신' 갖길…자기 생명력 자체로 크는 것

-물어보고 싶은 것이 바로 아이들 교육 문제였다.

▶ 큰 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 작은 아이는 초등학교 4학년인데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 학교 공부만 한다. 한국에서라면 꿈도 못 꿀 일이지만 그렇다. 여기선 학교 알아볼 때 공부도 공부지만 총기 사고가 덜 일어나는 곳인지, 다른 애들이 마약 같은 걸 많이 하진 않는지 그런 걸 우선 기준으로 삼았다. 다행히 이곳에선 그런 일이 적고 주변 아이들이 순수한 편이다. 공부에 대한 자극만 좀 덜할 뿐이다.

-한국의 부모들은 대부분 자기가 못다 이룬 꿈을 자식이 이뤘으면 하기도 하고, 경쟁에서 뒤처지면 안 될 것 같아 강박적으로 자식들에게 공부를 시키곤 하는데. 

▶ (여기서부터 부인이 영상통화에 동참했다) 한국에 있는 분들이 많이 걱정하신다. 그런데 애들 교육 여기서 훨씬 잘 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가져야 할 경쟁력은 여기서 더 잘 키워진다. 여러 환경의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배운다. 인생에 여러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몸소 깨우친다. 한국에선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 보니 조금만 뒤처져도 아이가 스스로를 '낙오자'라 생각하고 우울하고 불행하게 살 수 있다. 저희는 아이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어떤 환경에서도 잘 살 수 있는 '강철같은 정신'을 갖길 원한다. 학군 좋다는 도시에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특히 한국 도시에서의 자녀 교육은 '돈싸움' 같다. 돈만이 무기가 되는 삶을 가르치고 싶지 않다. 여기선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해 가면서 서로서로 좋은 영향을 끼치는 일이 많다.

(다시 남편 김선우씨) 저희는 부모가 자식을 키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자신의 생명력 그 자체로 자기 특성에 맞게 크는 것이고 우리는 그걸 지켜봐 주는 거다. 잘 큰다는 것의 기준에 학교 성적을 두지 않는다. 아이들 둘 다 완전히 다른 성향을 가지고, 다르게, 그러나 편안하게 자라고 있다. 딱 자기답게. 아이 스스로에겐 환경의 최대치를 스스로 이끌어 내는 능력이 있다.

-한국에선 어쩐지 불가능한 교육관 같다.

▶ 저희도 그렇게 생각한다. 저희 같은 가치관을 갖지 않은 분에겐 시골에서의 소박한 삶을 권하진 않는다. 한국에서 중산층이라면 집은 어느 정도, 차는 어느 정도, 이런 기준을 갖고 있을 텐데 그런 걸 버릴 생각이 없다면 이런 삶은 상당히 힘들 수 있다.

-한국에서의 4,50대라면 자녀 교육 외에 부모 부양이란 의무도 어느 정도 있다. 그런 건 없었나.

▶ 거기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것도 이렇게 살 수 있는 조건인 것 같다. 부모님은 저희 삶의 스타일을 처음엔 좋아하지 않으셨지만 감사하게도 크게 내색은 안 하셨다.

"일을 하고 싶은 만큼 선택할 수 있어 즐겁다"는 김선우씨. (사진=김선우씨 제공)© 뉴스1


-'하지 않는 것' '끊는 것'에 대한 얘기를 좀 더 해보자. 커피나 설탕 같은 것도 끊는다고 했는데 너무 금욕적으로 살고 있진 않은가.

▶ 별로 그렇지 않다. 일단 모든 경험을 한 번 해 본다. 없이 살아보고 나서 괜찮으면 계속 그렇게 살고, 커피의 경우 디카페인 커피 정도는 허용하는 정도로 살고 있다. 처음에만 괴로웠지 몸이 다 적응하더라. 술은 미국에 와서도 많이 마셨는데 2년 전부터 재미삼아 끊어 봤다. 술을 마시는 일이 더 재밌지 않더라. 그래서 자연스럽게 끊었다.

(부인)우리는 모든 것에 매이기 싫어서 그만둔 것이고 그래서 생기는 자유가 좋았다. 제가 회사에 충성하기 싫었던 것처럼 만약 베지테리언을 시도해 본다고 해도 그것이 즐거우면 계속 지속하겠지만 거기에 결코 얽매이거나 충성할 생각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직장생활이 지긋지긋하고 힘들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 요즘 본캐(본래의 캐릭터, 혹은 직업)와 부캐(부 캐릭터) 얘기들 많이 하지 않나. 직장에 매여 있으면 본캐에 충성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다. 그게 사실 높은 연봉도 안겨주고 좋은 점이 있다. 하지만 그 대신 부캐를 많이 갖고 있으면 굳이 하나에 목숨 걸 필요가 없으니까 마음이 편하다. 세상이 점점 변해서 '어떤 것에 목숨을 걸고 해야 한다'는 생각이 조금은 불합리하게 느껴지게 됐다. 좋은 학교를 간다고 좋은 직장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좋은 직장에 다닌다고 해서 정년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것보다 작고 다양한 삶의 과정들을 즐기고 '꼭 이게 아니어도 괜찮아'란 생각을 갖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회사형 인간으로 목숨을 걸고 살아도 일정 나이가 되면 은퇴해야 한다. 회사 나와서 하기는 싫은데 닭을 튀기거나 커피를 만들어 파는 도식적인 일을 할게 아니라 진짜 즐겁게, 그리고 수익도 창출해 살 수 있는 뭔가를 만들어 두면 좋지 않을까. 100세 인생,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꼭 평생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저는 은퇴를 일찍 했지만 은퇴하고 나서 이런 삶을 준비하고 뛰어들었다. 은퇴 전에 이런 생각들 해두시는게 좋지 않을까 한다. 

-앞으로의 계획은.

▶ 저희 부부가 모두 도시에서 나서 자랐고 한국에 대한 그리움도 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가 각종 문화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서울에서 차 없이 작은 집에서 소박하게 살아보는 걸 시도해 보고도 싶다. 아내는 해외를 돌아다니면서 잠시씩 정착해 살아보자고도 한다. 저희가 갖고 있는 장점이 이런 자유로움이다. 굳이 계획을 하지 않고 사는 게 계획이란 점. 첫째 아이가 대학에 가게 될 경우 그 이후가 되지 않을까. 물론 아이가 꼭 대학에 진학하지 않아도 좋다. 등록금을 줄 생각은 없지만 사업밑천을 대주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은 한다. 둘째만 데리고 잠시 살아봤던 지리산 인근의 시골 마을에서 사는 것도 생각해 본다. 정해진 것은 없다.

 

기사제공=뉴스1(시애틀N 제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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