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종식' 고르바초프의 유산, 푸틴의 야욕으로 처참히 망가졌다

고르바초프가 이뤄낸 긴장완화, 우크라 침공으로 헛수고 돼 

'표현의 자유' 중시한 고르바초프, 푸틴은 정반대로 '억압'

 

냉전을 종식 시킨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30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난 가운데, 영국 일간 가디언은 푸틴의 우크라이나 전쟁이 고르바초프의 유산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가디언은 이날 보도에서 "워싱턴과 모스크바 사이의 무력화과 군비 통제의 시대가 우크라이나의 유혈 전쟁으로 대체됐다"면서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러시아와 맞서고 있으며 핵 강대국 간의 직접적인 충돌 위험이 수반되고 있다"고 했다. 

지난 1991년 고르바초프가 권력에서 물러날 당시 나토와 소련 국경은 더 이상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가 아니었다. 나토는 동쪽 국경에서 수천 명을 제외하고 모든 군대를 철수시켰으며, 냉전은 사실상 종료됐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자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지난 6월 기자회견에서 동부 측면에 높은 수준의 준비태세를 갖춘 병력을 30만명 이상으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한편 우크라이나 침공 개시 당시 91세의 고령이었던 고르바초프는 푸틴 대통령의 결정에 직접적인 의견을 밝히진 않았다. 

다만 고르바초프와 가까운 사이였던 에코 모스크바의 알렉세이 베네딕토프 편집장은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모두 파괴됐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의 통역사로 일했던 파벨 팔라즈첸코는 폭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고르바초프는 항상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었다"면서 "그는 두 나라의 사이가 가까워질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그에게 있어 (현재 전쟁은) 매우 비극적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고르바초프는 강력한 '군비통제' 지지자였다. 그는 지난 1986년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 핵무기 폐기를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는 이와는 정반대로 상황이 흐르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의 핵무기 제한 협정을 휴짓 조각이 되어버렸다. 지난 9일 러시아 외무부는 "미국과의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뉴스타트)에 따라 사찰 대상이 돼 온 핵 시설들이 검사에서 한시적으로 면제될 것"이라고 통보했다.

고르바초프가 러시아에 남긴 유산은 데탕트(긴장완화) 뿐만이 아니다. 고르바초프는 러시아가 로마노프 왕조와 볼셰비키 혁명을 급하게 겪으면서 민주주의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다며 민주적 사고방식을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실제로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정책 기조 하에서 러시아는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 등이 크게 신장됐으며, 언론의 비판 능력이 크게 향상됐다. 

하지만 푸틴의 집권 이후 러시아의 민주주의는 급격하게 후퇴하고 있다. 특히 전쟁 시작 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실시하는 러시아군의 "특별군사작전"을 비판하는 사람에게 징역형을 부과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했다. 

고르바초프는 푸틴 집권하에서 점점 대중에 대한 발언을 하는 데 신중해졌다. 

지난 2011년 고르바초프는 미국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푸틴이 집권 초기 권위주의적인 통치 방법을 사용했지만, 미래에도 이와 같은 방식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선 잘못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는 이어 "20년 이상 통치하는 지도자가 있는 곳은...그런 상황에서 지도자와 주변 인물들에게 중요한 것은 권력을 유지하는 것뿐"이라며 "지금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푸틴을 비판했었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

시애틀 뉴스/핫이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