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염미숙] 마감

염미숙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마감


시간을 무한정 준다면 못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기간 내에 해내는 것이 실력입니다. 머리를 싸매고 있는 디자이너에게 팀장이 던진 한마디 말에 드라마를 보던 내가 찬물 뒤집어썼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 달에 책 한 권을 쓴다는 어느 작가의 말도 귀에 울렸다. 마감을 정해 놓고 시작하라. 정하지 않으면 영영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

삼학년 개학 전날이었다. 여름방학 숙제가 밀려서 밤을 새웠다. 그냥 학교에 갈 배짱도 없고 날이 새기 전에 다 해낼 수 있을까 걱정돼서 엉엉 울었다. 꿀밤을 먹이고 싶었을 텐데도 아버지는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함께 밤을 새워 주셨다. 

결국, 다음 날 아침까지 숙제를 다 마쳤다. 아침에 학교 가자고 친구가 왔다. 내가 밤새 눈물 훔치며 해놓은 숙제를 황급히 베끼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자라면서 미루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계속 짊어지고 다녔다. 시험 전날 밤새 눈 붙이지 못하고 머릿속에 암기할 내용을 구겨 넣었다. 아침이 밝으면 단어 하나라도 굴러 떨어질까 머리를 고이 모시고 학교로 가서 그대로 펼쳐 시험을 보고는 집에 오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저녁에 일어나 다음날 시험을 위해 또 밤을 새웠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미루다 보면 급박한 시각의 집중력은 쓸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분량이 감당할 만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 돌아보면 그건 일종의 객기였다.

노학자가 공부의 노하우를 공개했다. 일찍 시작하라. 최종본을 제출하기 전 퇴고의 시간을 더 갖게 된다. 미리 구상하고 준비할수록 완성도가 높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일찍 출발점에 섰다 해도 길이 고속도로처럼 늘 곧게 뻗지는 않는다. 극심한 정체가 찾아온다면 미리 출발했다 해도 지각할 수 있다. 

좁은 길을 구불구불 돌아 마침내 종착지에 겨우 다다르기도 한다. 정체가 오면 누군가는 산책이나 목욕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태우는 일로 타는 마음을 달래기도 한다. 개학 전날 밤처럼 울 수도 없고, 나는 무엇으로 정체 구간을 빠져나와 목적지에 닿을까?

어느 젊은 작가가 매일 한 편씩 글을 올리겠으니 돈을 지불하고 내 글의 독자가 되어주겠냐고 제안했다. 작가로서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 것을 세상에 공포하고 싶었을까? 자신의 방문을 잠그고 죄수를 자처하는 작가도 있지만, 독자들과의 약속으로 자신을 묶다니. 독한 극약처방이다. 그 책임감에 짓눌리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작가는 이 도전적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나서 매일 화상도가 높아진 삶을 살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마감은 땅이 끝나는 절벽. 그 지점을 넘어서면 글은 떠나야 한다. 더 이상 작가의 소유가 아니다. 작가는 절벽 끝에 남고 글은 작가의 품을 떠나 독자에게로 날아가 안긴다. 글은 작가가 낳았음에도 작가 자신보다 더 오래 사람들의 마음 안에 살게 될지도 모르는, 또 다른 오묘한 존재가 된다.

신음이든 머리를 쥐어 뜯기든, 전율하는 영감이나 뜻밖의 돌파구이든 마감 이전에만 겪을 수 있는 일들이다. 작가는 이 고된 노동을 자의로 선택한 사람이 아닌가. 때로는 배변의 욕구는 있으나 한 방울의 소변도 볼 수 없는 방광염의 상태처럼 고통스럽더라도, 스스로를 가두는 마감의 훈련을 시작한다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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