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는 목마름으로 저항, 생명' 김지하 시인 별세했다

<왼쪽부터 김지하 시인, 부완혁 사상계 대표, 김승균 〃 편집장, 김용성 민주전선 출판국장, '오적'이 실린 사상계 5월호(출처 국가인권위원회)© 뉴스1>

 

군사독재에 맞서 '오적' '타는 목마름으로' 등 남겨

생명사상 심취…칼럼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등으로 변절 논란도 

 

한국을 대표하는 저항시인이자 생명운동에 헌신한 김지하씨가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五賊) 등의 작품을 남기고 8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1세.

토지문화재단 관계자는 이날 뉴스1에 "오늘 오후 김지하 시인이 강원도 원주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밝혔다. 김지하 시인은 최근 1년여간 암 투병생활을 해왔다.

고 김지하 시인은 서울대 미학과 재학시절에 4·19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 그리고 6·3사태를 겪으면서 학생운동에 깊게 관여했고 이를 저항시로 표현했다. 그는 1990년대 이후 민중사상에 독자적 해석을 더해 '생명사상'이라 이름하고 생명운동에 뛰어들었다.

고인의 본명은 김영일이다. 필명 '지하'는 고인이 서울대학교 미학과 재학 시절인 1963년 22세에 시화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직접 지었다.

고인은 회고록에서 "선배가 점심때 소주를 사줘서 실컷 먹고 갈지자로 종로길을 마냥 걸었다"며 "길가에 주욱 늘어선 다방, 이발소, 이용실, 뭐 그런 것들의 입간판인데 위쪽에 다 똑같은 자그마한 검은 가로 글씨로 모두 한글로 '지하'라고 하나같이 써 있었다 '옳다 저것이 내 필명이다'고 정했다"고 말했다.

한편 고인은 '지하에서 활동한다'는 뜻의 필명 지하(地下)를 이름처럼 사용하는 과정에서 한자를 다시 바꿨다. 그는 우리 강산을 담아내기 위해 지초 지자에 하천 하를 써서 지하(芝河)로 바꿨다.

시집 '오적' 겉면과 뒷면© 뉴스1


고인은 1969년 11월 시인지에 '황톳길'을 통해 공식 등단했으며 1970년 5월 사상계에 풍자시 '오적'(五賊)을 발표해 필화사건을 겪으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저항시인으로 떠올랐다.

풍자시 '오적'은 '한일협정반대운동'에 참여했던 고인이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을사오적에 빗대어 당시 만연했던 부정부패와 비리를 해학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오적'의 유포를 막기 위해 사상계의 시판을 중단했으나 이 시는 야당인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 6월호에 다시 실렸다.

정부는 이를 빌미로 같은달 20일에 김지하 시인을 비롯해 사상계 대표 부완혁, 편집장 김승균, 민주전선 출판국장 김용성 등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결국 사상계는 1970년 9월28일자로 등록취소를 당했으나 문공부장관을 상대로 등록취소처분취소 청구소송을 제기해 1971년 10월26일 서울고법 특별부에서 승소판결을 받았다.

고인은 1971년 가수 김민기와 함께 야학 활동을 시작했고 1973년 4월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씨와 결혼했다. 이들 사이에는 아들 김원보, 김세희 형제가 태어났다.

그는 1973년 12월 우리나라 마당극의 효시라고 불리는 '진오귀굿'을 작·연출하기도 했다. 마당극 '진오귀굿'은 죽은 이의 한을 씻기고 좋은 곳으로 보내기 위해 망자의 가족이 무당을 불러 벌이는 전통굿을 차용해 농촌계몽운동의 하나로 공연한 작품이다.

고인은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또 다시 옥고를 겪었으며 긴급조치 4호 위반혐의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고인의 대표작 '타는 목마름으로'는 이 시기에 나온 작품이다. 고인은 이 작품을 통해 노벨평화상과 노벨문학상 수상자에 추천된 바 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김지하의 구명을 위해 프랑스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미국의 노엄 촘스키 등 해외 문인과 지식인들과 연대해 '사법 살인'을 막자고 적극 나섰고 이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가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석방된 고인은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으며 같은 해 3월 13일 서울에서 원주 집으로 가려고 나오다가 중앙정보부에 연행 다시 구속됐다. 이후 재판을 받고 다시 무기징역에 징역 7년형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결국 그는 1980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고 김지하 시인(출처 목포문학관)© 뉴스1


고인은 1984년 사면 복권되고 저작들도 해금됐다. 그는 이 무렵을 전후해 최제우(崔濟愚) 최시형(崔時亨) 강일순(姜一淳) 등의 민중사상에 독자적 해석을 더해 '생명사상'이라 이름하고 생명운동에 뛰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민주운동 진영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1991년 민주화 투쟁에서 연쇄 분신을 질타하는 칼럼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원제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를 발표하고 2012년 대선에서 당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해 '변절'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한편 고인은 1941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났다. 그는 목포산정초등학교,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수학했으며 2008년부터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석좌교수로 있다가 2013년부터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좌교수로 재임하고 있었다.

고인의 빈소는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장례식장 5호실에 임시로 마련됐으며, 9일 중 특실로 옮길 예정이다.

고 김지하 시인 (뉴스1 DB)2022.5.8/뉴스1


기사제공=뉴스1(시애틀제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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