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문해성] 꽃이 없다
- 22-04-18
문해성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꽃이 없다
결혼기념일에 무엇을 하고 싶은 지 남편이 물었다. 직접 나서서 어떤 것을 하고 싶다거나,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데도 그는 똑같은 질문을 매번 한다. 언제나 남편이 계획하고 준비해왔다. 남편의 씀씀이가 과하다 싶을 만큼 커도 그날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1년에 몇 번 안 되는 특별한 날이 아니던가. 자칭 로맨틱한 남편이란 그의 기를 살려주고 나도 여왕처럼 대접받는 게 은근히 좋아서다.
남편은 해마다 기념일이면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이나 유명 맛집을 예약해두었다. 나도 이 특별한 외출을 위해 신경 써서 옷을 차려 입었다. 평소 잘 신지 않는 구두를 신고, 장롱 안에 잠자던 액세서리까지 걸치면 그날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살짝 설레기도 했다. 어쩌면 이런 특별한 날이 있어 평범한 많은 날을 살아갈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벤트를 좋아하는 그의 고민이 컸나 보다. 코로나로 어디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나갈 수도 없으니. 몇 주 전에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스노모빌을 타러 가자고 했다.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자 영상까지 보여주며 나를 채근했다. 그의 마음은 이미 스노모빌을 타고 설원을 달리는 듯 보였다. 멋진 풍경에 마음이 갔지만, 위험한 눈길 운전을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게다가 헛돈을 쓰고 싶지 않다는 나의 속내도 있었다.
마침 집 근처에 한국 레스토랑이 오픈했다. 한번 가보고 싶던 차에 좋은 기회라 여겼다. 돌솥에 담긴 비빔밥은 한국 음식에 대한 그리움을 싹 풀어주었다. 깔끔하게 그릇을 다 비운 남편을 보면서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특별한 날이라고 해서 꼭 고급스럽고 비싼 곳에 갈 필요는 없지. 이렇게 먹고 싶은 음식을 맛있게 배불리 먹으면 됐다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잘 먹고 집에 돌아와도 김치에 밥 생각이 났던 것에 비하면 더욱 그랬다. 커피숍에 들러 커피까지 마시자 더 바랄 게 없는 하루였다. 그런데 종일 뭔가 허전한 마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주부가 다 됐네, 백화점을 나오면서 친구가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다. 전과 다르게 물건을 보며 선뜻 고르지 않고 가격표를 먼저 살피더라는 것이다. 결혼하고 몇 년 지나 들은 그 말은 싫지 않았다. 그동안 알뜰해졌고 경제개념이 생긴 주부로 인정받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문득 친구에게 묻고 싶은 그런 날이다.
남편은 떨어져 외국에 있을 때도 특별한 날에는 잊지 않고 꽃을 보내왔다. 오늘이 해마다 꽃다발을 안고 함박웃음을 짓던 그날이다. 그런데 꽃이 없다. 삼 년 전 나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꽃이 예쁘기는 하지만 1주일 후에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게 아까웠다. 꽃 대신 돈으로 주면 좋겠다고. 남편이 말을 너무 잘 듣는 것도 문제였다. 그는 바로 실행에 옮겼고 더 이상 꽃은 배달되지 않았다.
꽃을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매주 꽃병에 꽃을 꽂았다. 그러다 자주 새로 갈아야 하는 꽃값이 아까워서 화분으로 교체했다. 물만 잘 주면 오래 유지할 수 있어서 그야말로 경제적이었다. 한 달이 넘도록 식탁 위에 같은 꽃이 피어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남편이 꽃을 보며 환하게 웃던 것이 언제인가 싶다. 새로 꽂은 꽃을 볼 때마다 예쁘다며 좋아했는데.
연애 시절에도 공항에서 꽃을 들고 기다리던 사람이다. 그의 그런 행동이 속으로 좋으면서도 나는 좀처럼 익숙하지 못했다. 서양인들의 매너인가 싶어 쑥스럽게 꽃을 받곤 했다. 그런데 엄마는 달랐다. 공항에서 꽃다발을 받고 아이처럼 좋아하며 사위를 덥석 끌어안았다. 남편과 엄마의 첫 대면이었다. 엄마는 꽃다발에 담긴 남편의 마음을 온전히 읽었던 것 같다. 당신도 좀 배우시오, 라고 아버지에게 곁눈질하며 행복해했는데. 꽃이 주는 그 행복을 돈으로 계산하다니.
알뜰하게 살아야 한다는 핑계로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지는 않았는지. 작은 것을 계산하다가 큰 것을 망친 기분이다. 남편에게 꽃은 마음을 전하는 기쁨과 사랑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생일이나 기념일 뿐만 아니라 누군가 소중한 사람을 마중 나올 때는 늘 꽃을 잊지 않았다. 멀리 친구나 친척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그는 꽃을 보냈다.
꽃은 마음이다. 우리 집에 다시 꽃을 피워야겠다. 꽃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봄처럼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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