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이 에스더] 우아한 손님이고 싶었다
- 22-04-03
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우아한 손님이고 싶었다
마중 나온 딸의 얼굴에 서둘러 달려온 기운이 역력하다. 천천히 오지 그랬어. 일찍 나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겼어요. 미안해요, 엄마. 우리 밥 먹고 들어가요. 바람에 흐트러진 생머리를 만지며 운전대를 잡은 모습이 아가씨 적 그대로다.
오랜만에 딸과 함께 먹는 음식 맛이 특별하다. 식사하는 사람 중에 딸이랑 온 사람은 나뿐인 듯해서 은근히 기분이 좋다. 애들 없으니 천천히 먹어라. 엄마는 너무 많아서 다 못 먹겠다, 더 먹어라. 제 것도 많아요, 하고는 그릇을 깨끗이 비운다. 아이고, 내 새끼. 배고팠구나.
집으로 가는 길에 고주알미주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지만, 함께 하지 못했던 시간을 되찾은 것 같아 마음이 푸근하다. 눈에 익은 길이 보이자 아이들과 만날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살갑게 구는 첫째와 달리 둘째는 작년에 본 할미가 낯선지 제 엄마 뒤에 숨어서 웃고만 있다. 꼭 안고서 통통한 볼에다 뽀뽀하고 싶은 건 짝사랑하는 나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가까이 살면서 자주 봐야 정이 들 텐데.
밤새 아이들에게 이불 덮어주느라, 바람 소리에 뒤척이느라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그래도 손주들과 한방에서 자니 좋다. 새들이 아침을 부르고, 호수 위를 나는 오리 떼가 햇살을 물어 나른다. 쏴아, 통통통, 콩콩콩, 딸그락딸그락, 치카치카…. 까치머리를 하고 일어난 꼬맹이들의 하루가 소리로 북적인다. 이른 아침에 딸의 손에 이끌려 가는 어린 것들이 짠하다.
아이들이 폴폴 날리고 간 먼지가 곁에 가만히 내려앉는다. 이제야 집안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부엌부터 시작해야 하겠지. 점심 먹는 것도 잊은 채 씻고 닦고 했더니 부엌이 훤해졌다. 보면 좋아하겠지. 엄마, 저 왔어요. 딸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자랑스럽게 부엌을 가리켰다. 가스 스토브가 새것이 되었네요. 어? 기대와 달리 딸의 표정이 얄궂다. 아차, 깜빡했네. 아이고, 어떡하나.
오랜만에 둘이서 외식이나 하고 오라며 사위의 등을 떠밀었다. 애들 걱정하지 말고, 근사한 데 가서 잘 먹고 오너라. 제 엄마가 없어서 그런지 할미가 좋아졌는지 드디어 둘째가 품에 안긴다. 쪽 소리 나는 뽀뽀 한 번에 구름을 탄 것 같다. 아이들과 한바탕 놀았더니 이마에 땀이 송송, 숨이 차고 힘이 빠진다. 아이고, 할미 힘들다. 좀 쉬었다 놀자. 등 떠밀어 내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딸을 기다리고 있다. 차르르륵, 차고 문 열리는 소리에 애들보다 내가 더 딸을 반긴다.
우리 집에 있는 뜨끈뜨끈한 침대 생각이 간절하다. 혼자 있는 남편도 궁금하다. 어제 저녁부터 둘째가 슬슬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다.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이 내 입에서도 곧 튀어나오려 한다. 요것들아, 제발 내 딸 좀 그만 괴롭혀라. 어머니의 그 마음이 지금 내 마음이다. 야야, 너희들 셋째 가질 생각일랑 꿈에도 말아라. 네 몸 다 망가진다. 짠한 내 새끼.
며칠째 부엌에만 붙어 있자니 보통 일이 아니다. 딸의 말을 들을 걸 그랬나. 엄마가 안 해줘도 지금까지 잘 먹고 살았으니까 그냥 쉬라 했는데. 그런데 지금 아니면 언제 또 해주겠어. 딸이 셋이면 딸네 집 싱크대 밑이 무덤이 되는 수가 있다더니 틀린 말이 아닌 듯하다.
엄마, 저녁때 우리 사우나 가요. 그래, 거기라도 가서 좀 쉬자. 때밀이에 마사지까지 받고 나니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딸의 얼굴에 스치던 얄궂은 표정의 이유를 알았다.
엄마가 미안해. 마음이 앞서서 그랬다. 우아한 손님으로 있다 가야지 했는데,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에 이것저것 다 잊어버렸지 뭐냐. 네 집인데 엄마가 설쳐대며 잔소리까지 했으니 얼마나 속상했겠냐. 앞으로는 꼰대 짓 안 할란다. 지킬 자신도 없는 말을 뱉어 놓고 나니 입안이 씁쓸하다. 너도 나중에 네 딸 집에 가봐라. 엄마 생각날 거다.
빠빠이, 하므니. 여름에 시애틀에서 만나자, 우리 강아지들. 딸네 집을 나서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 집에 다녀가실 때 어머니의 눈에 그렁그렁 고여 있던 눈물의 무게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비행기는 서쪽을 향해 날아가는데, 내 눈길은 동쪽으로 이어지는 실낱같은 길을 찾아 구름 속에서 헤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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