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안문자] 출발점

안문자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출발점 


책상을 정리하다 멈칫했다. 접어진 메모지에 ‘내 힘들다!’를 거꾸로 하면 ‘다들 힘내!’라고 쓰여 있다. 종이를 버리지 못하고 상념에 빠진다.

지난해, 힘든 사계절을 겪는 동안 끝없는 이별을 보았고 지금도 그 아픔은 이어진다. 그건 지구 건너편에서 7.2도의 지진으로 숱한 사상자가 났고, 또 다른 곳에서 기아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님을 뼈저리게 자각하는 계기가 됐다. 

코로나19는 많은 깨달음을 주고도 아직 충분치 않다는 듯 거침없는 기세로 70억 인구의 요람 지구촌을 흔들고 있다. 땅이 고열로 신음하고 바다가 해일로 몸을 뒤척인다, 그만큼 지구의 몸살은 깊고 위중하다. 어느 누가 내 책임은 아니라고 ‘손을 씻을’수 있을까. 비닐봉지를 아무데나 버렸고, 음식 찌꺼기를 강물에 흘려보냈다. 아름다운 지구에 병균을 제공한 공범을 면제받기 어려울 거다. 

백신을 만나기 위해 긴 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노년의 그늘진 얼굴들. 끝이 안 보이는 펜데믹은 사회 전반에 암울함을 던지고 있는 중에 경제는 내리막을 달리고 서민 생활을 불안에 떨게 한다. 예기치 못했던 일상의 어려움을 구체적으로 마주하며 소박한 인간다운 삶마저 위협받게 되었다. 

작가인 S교수는 한 중소기업의 사장으로부터 특강을 부탁받았다. ‘육 개월 동안 월급을 주지 못했습니다. 아주 작은 회사예요. 연말 보너스를 이 특강으로 주려고요. 강사료는 20만원밖에…’ 사장의 더듬대던 말끝은 울먹임 때문에 흐려졌다. 가슴이 쿵 내려앉은 여성 작가는 ‘네, 갈게요. 가고말고요.’ 흔쾌히 허락했다. 

강사는 사장과 30여 명의 회사원들을 대하자 왈칵, 목이 메었다. 착한 아이 얼굴 같은 청년들이 온기가 없는 추운 사무실에 모여 있었다. 시작된 강의는 참을 수 없이 솟구치는 눈물 때문에 잘 이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어려운 회사가 어디 한둘이랴. 강사는 마치 자신의 동생들이나 아들딸에게 하듯 깊은 사랑으로 말을 이어갔다. 도산을 앞둔 회사의 젊은 사장에게도 힘을 실어주고 싶어 그의 모든 지혜를 동원했고 격려의 말을 찾아 열심히 전달했다. 

지금은 모두가 힘든 세월을 보내고 있다. 아무리 어려워도 용기를 잃지 말라. 절대로 꿈을 포기하지 말라. 고난과 역경은 지나가는 것이다. 세상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모든 것은 변한다. 단 한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은 진리,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고 희망을 만들어 갔던 자신을 진솔하게 내보였다. 작가는 뜨거운 가슴으로 외쳤다. 희망은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 내 안에 잠자던 혼을 깨어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희망이다. 

작가의 강렬한 음성에는 굳은 의지가 배어 있었다. 끝인 듯 보이는 바로 그곳이 새로운 출발점이다. 새로운 출발점! 사장의 눈이 반짝였다. 직원들의 눈도 함께 빛나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강사는 20만원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의 터널을 건너온 지난 세월, 고통과 슬픔으로 범벅이었던 젊은 날의 고백인 책을 꺼냈다. 

악몽을 이기고 새로운 생의 기쁨을 갖게 되었다는 자전적 수필집 백 권을 선물로 증정했다. 희망과 꿈이 박살나고 어른거리던 죽음의 그림자를 밟고 일어선 자신의 이야기가 진솔하게 담긴 책이다. 수없이 초청되었던 강연이지만 강사료를 물리치고 선물을 내민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강사료와 비교할 수 없는 값진 소득이었고 보람과 기쁨으로 뿌듯했다. 

강의가 끝나고 그들은 떡과 귤, 오징어 몇 마리를 놓고 소주 파티를 했다. 사장이 먼저 떨리는 목소리로 잔을 들고 외쳤다. ‘내 힘들다!’그러자 붉어진 눈으로 직원들이 소리쳤다. ‘다들 힘내!’용기를 주고받으며 각오를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강사는 뭉클한 마음을 달래며 끝까지 그들과 함께했다. 그날의 눈물겨웠던 분위기에서 그들의 결의와 희망이 가슴으로 전해왔다. 그는 속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보너스대신 희망의 강의를 들었고 고통과 슬픔의 언덕을 넘어 승리한 기적의 삶이 기록된 책을 받았으니 그들은 용기를 얻었으리라. 사장과 직원들이 한마음이 되어 이 난세를 뚫고 나간다면 오래지 않아 오뚝이처럼 일어서리라는 확신이 든다. 

시련을 오히려 축복으로 역전시키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절망은 없다, 이쪽 문이 닫히면 저쪽 문을 열어주고 길이 없는 곳엔 길을 만들어가는 지혜와 능력을 공급받을 것이다. 

기업이란 이문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고, 상업이란 이익을 추구하기보다 의를 추구하는 것이 더 귀하다고 말한 어느 거상이 생각난다. 이 회사는 당장 이문을 남기지 못했지만, 사람을 남기는 회사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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