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김학인] 내 사랑 토파즈반지

김학인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고문)

 

내 사랑 토파즈반지 


생각지도 않은 반지가 하나 생겼다. 두어 해전 하와이 여행에서 얻은 선물이다. 갸름하고 자그마한 연분홍산호 옆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조각이 산호를 보좌하듯 박혀 있다. 은은한 멋을 풍기는 디자인, 굵지도 가늘지도 않은 곡선으로 멋스럽게 한번 휘감은 18금 테가 어울리는 반지는 거칠어진 내 손가락을 돋보이게 한다.

내 작은 목각 상자에는 값지거나 화사하게 시선을 끄는 반지는 아니어도 보물 같은 반지가 하나 있다. 내가 결혼하던 50년대 후반에는 괜찮게 사는 집에서만 다이아몬드 반지를 신부에게 줄 수 있었다. 그것은 행복을 약속하는 증표요, 상징으로 여긴 듯하다. 

한 친구는 다이아몬드 반 캐럿 결혼반지를 받았다고 어깨를 들썩였다. 그녀의 반지는 중지에서 무지갯빛을 사방에 뿌리며 최고 보석의 매력을 한껏 과시했다. 또 다른 친구는 사 분의 일 캐럿, 그것도 별처럼 반짝였다. 일부러 물건을 잡으면서 손가락을 약간 높이고 친구들을 흘낏 보며 반응을 살피곤 했다. 보석에 별 관심이 없었던 탓에 나는 형편에 맞는 평범한 금반지로 만족했다. 

그런 내가 50년이 넘게 애지중지 아끼는 그 반지는 가족사의 한 시절을 담고 지금도 원래의 빛과 모양 그대로 따뜻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잘 다듬은 네모진 노란 토파즈가 박힌 백금 반지. 볼 때마다 지난날의 눈물겹던 순간이 되살아난다. 

시카고의 5월은 습기 머금은 꽃바람 속에 익어간다. 어느 날, 직장에서 돌아와 보니 집이 텅 비어있었다. 어디들 갔지? 근처에 사는 한국 친구네 집에 놀러 갔나 보다고 생각하며 저녁을 준비하면서 기다렸다. 미국 생활 사 년 차, 이젠 영어도 잘하고 이곳 생활에 익숙해진 삼 남매는 초등학교 4학년 5학년, 그리고 6학년생이다. 어느새 창밖엔 어둠이 내려앉았고 건너편 아파트 유리창이 하나둘 불을 밝히기 시작했건만 아이들은 소식이 없다. 

초조해진 나는 애들이 갈만한 몇 집에 전화를 걸어봤으나 번번이 허탕이다. 저녁상을 차려놓았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 때문에 안절부절못하고 밖을 들락거리는데 멀리 가로등 아래로 긴 그림자를 끌고 셋이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큰아들 손에는 봉지 하나 들려있는 게 보였다. 반가움과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도 내 입에선 불맨 소리가 튀어나왔다. ‘쪽지라도 써놓지….’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땀에 얼룩진 얼굴들이 배고픔에 지친 듯하나 표정은 밝았다.

“엄마, 이거!”

“그게 뭔데?”

“내일이 어머니 날이잖아.”

봉지를 내밀며 아들이 자랑스럽게 하는 말에 쑥스러워진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세 아이의 반짝이는 눈이 봉지를 받아 쥔 내 손을 지켜본다. 그 속엔 예쁜 메모용 수첩과 작은 종이상자가 들어있었고 안에 포장지에 싼 노란 토파즈반지가 나왔다. 

“어머나, 반지네, 반지! 토파즈 반지구나!”

“예쁘지, 엄마?”

나는 놀라며 딸에게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희망과 건강을 상징하는 토파즈는 내 생일이 있는 11월의 탄생석이다. 누가, 어떻게 그걸 알아냈을까? 그즈음 막내는 신문을 돌리며, 딸은 아이 돌보기로, 큰아들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도우미로 각각 용돈을 벌었다. 그 여린 손때 묻은 돈을 모아 어머니 날에 토파즈 반지를 선물하기로 의기투합한 아이들이 늦도록 가게마다 찾아다녔을 모습이 눈에 어른거리자 나도 모르게 울컥 목이 메었다. 

장난이 심하고 가끔 말썽을 부려 나를 힘 빠지게 하던 철부지 아이들…. 물론 반지는 그럴듯하게 만든 모조품이다. 그러나 순수한 아이들의 땀과 정성이 담긴, 진품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반지. 그 반지는 초심을 잃지 않고 내 낡은 목각 상자를 지키는 주인이다. 

그 몇 달 전 일이다. 학업을 매듭짓고 취업을 위해 혼자 밤 비행기를 타고 먼저 귀국하는 남편을 배웅하고 자정 가까운 시간에 돌아왔다. 아이들이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방에 돌아온 내게 침대 머리에 붙은 쪽지 몇 장이 눈에 띄었다. ‘괜찮아 엄마, 우리가 있잖아요.’ ‘엄마, 사랑해요. 잘 주무세요.’ ‘우리 잘할게요. 엄마, 힘내세요!’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엄마를 위로하려고 궁리하며 특별한 선물을 준비한 게 틀림없다. 아, 누가 그들 마음 깊숙이 이 순수한 사랑을 심어주었을까.

장성한 아들딸은 그 옛날 일을 잊었겠지만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광야 같은 초기이민 생활에 심신의 고달픔과 소외감을 단숨에 벗기고 가슴 벅찬 기쁨으로 내게 용기와 꿈과 새 힘을 돋아준 그 날들, 그 감동을 잊기에는 너무 소중하다. 

햇살 좋은 오후, 창가에 앉아 구부러진 약지에 토파즈반지를 끼고 빛바랜 사진들을 정리하며 행복에 젖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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