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김윤선] 코로나 시대의 그들
- 21-03-01
김윤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코로나 시대의 그들
자다 말고 녀석이 눈을 떴다. 이 늦은 시각에 웬 일이냐는 듯 누운 자세 그대로 멀거니 나를 바라본다. 잠귀도 밝지, 가까이 다가가 토닥토닥 등을 두드렸다. 녀석은 그마저도 귀찮은 듯 꼼짝도 하지 않는다. 부스스 뜬 눈에 가느다랗게 빨간 물이 괴어 있다.
일전에 읽었던 정유정의 소설 『28』이 생각났다. 인수(人獸)공통전염병이라는 원인불명의 바이러스로 인한 화양시의 28일간의 이야기다. 전염병 ‘빨간 눈 괴질’이 반려동물과 인간 사이를 오가며 목숨을 앗아가자 정부에서는 도시를 봉쇄하고 개를 살처분한다. 개가 숙주라는 이유다. 공포심에 휩싸인 사람들은 어제까지의 반려견을 길에 내몰고 그들의 죽음을 모른 척한다. 만약 나도 거기에 있었다면 이 녀석을 어떻게 했을까.
코로나19가 처음 기승을 부릴 때 미국에선 워싱턴주가 발원지로 주목받았다. 그리고 동양인들이 타깃이 되면서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만약 그때 연방정부에서 워싱턴주를 봉쇄했더라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 그러잖아도 당시 동영상으로 본 시애틀 다운타운은 도시 전체가 텅 비고 상가엔 보호벽을 하고 음침하고 음울한 기운이 가득했는데 소설 속 화양시처럼 무법천지로 변하지 못할 것도 없어 보였다.
세상은 늘 예기치 않은 사건사고들로 가득하지만 뒤이어 탈출구가 생기는 게 또 사람 사는 세상이다. 세상이 형체 없는 침입자에 두려워하고 있을 때 곧바로 세상을 위로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행동들이 있었다. 유폐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세계적 오페라단과 서커스단들이 저들의 공연물을 무료로 게시하고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는 연주자도 많았다. 백신 개발을 위해 큰돈을 기부한 사람들도 있었다. 인간애를 통해 세상의 신뢰를 지키려는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가짜 진단키트를 만들고 함량미달의 마스크를 만들어 개인의 욕심을 채우는 이들도 있었다. 죽은 자의 이름으로 배부된 연방정부의 재난지원금을 가로챈 가족도 있었다니 같은 상황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본질이 이렇듯 다르다는 실감을 했다.
타이타닉호가 침몰됐을 때도 아수라장이 된 선상에서 끝까지 사람들을 위로하고 침착함을 되찾게 한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악단을 이끈 바이올린 연주자 윌리스 하틀리를 비롯한 여덟 명의 연주자였다.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함으로써 오늘날 타이타닉호를 영원히 기억하게 만든 요인이 됐다.
생사를 가르는 최악의 사태에서 일찌감치 삶을 양보한 그들의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이 남다른 이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얼마만큼의 신앙이 바탕 되어 있었던 것일까. 소설에서도 전염병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무서운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사람도 함께 존재한다는 걸 보여주었다. 동시에 생명존중이 인간에 한하지 않는다는 것도 말하고 있었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세상엔 제 자리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하는 수많은 그들을 보게 된다. 코로나19의 진원지를 알리고 환자들을 돌보다 죽은 중국 의사 리원량과 당국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이를 취재한 용기 있는 시민기자 장잔 외에도 또 다른 시민기자들이 있었다. 날마다 예방수칙을 알리고 주의를 당부하며 일선에서 활동한 의료진들과 방역단체 사람들, 일찌감치 mRNA에 눈뜬 카탈린 카리코. 그녀에 의해 개발된 백신 모더나, 그리고 백신 화이자야말로 세상을 위로한 최고의 선물 아니겠는가. 그와 관련한 백신 개발 초고속 작전의 총괄 책임자인 몬세프 알라위, 모더나 회장인 노바르 아피옌도 역사를 새로 쓴 그들이다. 은퇴한 의사들이 현장에서 수고하다 숨진 이들도 꽤 있다고 하니 신만이 아는 그대들 또한 숱할 것이다.
이제 백신 접종이 시작됐고 2020년 한 해를 몽땅 삼켜버린 바이러스와의 전쟁에도 희망이 보인다. 미국 전역의 사망자가 50만 여 명에 이른 건 안타깝고 슬프다. 그러나 작년에 잃은 봄을 올해는 되찾을 기대를 갖게 하는 건 그들 덕분이다. 열린 마음과 사랑이 결국 위기를 헤쳐 나가는 동력이 아닐까 싶다.
컴퓨터를 닫고 일어서려는데 코고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녀석이 의자 뒤에서 코를 골고 있다. 나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해줘서 고맙다. 입맛을 쩝쩝 다시는 녀석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 가슴에 꼬옥 끌어안았다. 녀석이 움찔하더니 아닌 밤중에 웬 홍두깨냐며 크흥, 콧방귀를 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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