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윤영목] 중학교 과정 졸업하자 6ㆍ25사변 터져(운동권의 어제와 오늘-4)

윤영목(서북미 6ㆍ25참전 국가유공자회 회장)

 

중학교 과정 졸업하자 6ㆍ25사변 터져

 

대구경찰서 앞에 있던 학생들과 군중은 한동안 반군정 반정부 구호를 외치다가 해산했으며 필자는 그 자리를 급히 떠나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미군이 장갑차를 동원해 폭동 진압에 성공해 대구일대는 일단 안정을 되찾게 됐다. 10ㆍ1사건의 주원인은 미 군정하의 식량사정 악화로 반군정을 겸한 남로당 조종하의 민중봉기 사건이라고 한다. 

그 당시 대구와 영천, 군위, 구미 등 지방에서는 인민재판에다 총격전까지 벌어져 정부인사와 시위대 뿐만 아니라 다수의 무모한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10ㆍ1사건이 진정세를 보이자 정부는 남로당세력 축출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으며 필자가 다니던 학교 수업시간에도 형사들이 나타나 민애청 주모자 체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때에는 민애청 운동권 학생들의 정체가 확연히 드러나 있었고 이들은 등교도 소홀히 하면서 이곳저곳 몸을 피해 다녔고 마치 역사책에 나오는 애국 혁명지사가 된 것처럼 대담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이 시점에 정부가 민애청 퇴치를 위해 고안해낸 것이 민애청에 대항하는 ‘학련’이란 정부지원 우익 학생단체 조직을 승인해 이들에게 무제한 반 민애청 활동 권한을 부여했다. ‘학련’단체 학생들의 민애청 계열 학생들에 대한 압력이 노골화되자 민애청 활동은 서서히 줄어들고 일부 운동권 학생은 타교로 전학 또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대구지역에서 소요사태는 1948년경까지 지속되었으나 자유당 정부수립 후 1949년부터는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리산, 태백산 지역에서의 빨치산 활동은 계속되고 있었다. 또한 해방 후 격동기의 중대사건으로 정치요인 암살사건이 연달아 발생했다.

1945년 송진우, 1947년 여운형과 장덕수, 1949년 김구 등 거물급 정치 지도자들이 차례로 괴한들의 총격으로 피살됐다.

필자가 1950년 5월 하순에 6년제 중학교 과정을 수료하자 1개월후 6ㆍ25사변이 발발하였다. 필자를 포함한 급우 상당수가 국군에 입대해 조국 방위를 위해 참전하였으나 재학중 좌편향이던 일부 학우들은 인민군 치하지역에서 인민군을 위한 각종활동에 종사했다. 

2000년 5월, 졸업 50주년 동기동창회가 대구에서 개최되었는데 174명 졸업생 가운데 약 반수인 90명 정도가 참가했었다. 참가하지 못한 일부 동기생들은 전란 중 사망, 월북, 실종, 기타 사유로 참석하지 못했다.

동기생들은 졸업당시 만 18세에 헤어졌고, 68세에 다시 만났던 모임이었다. 사회 각 분야에서 성공한 장관, 총재, 회장, 교수, 장성, 실업인 등 모두가 얼굴을 확인하자 ‘너와 나’순진했던 중학생으로 되돌아가 흘러간 옛이야기로 만남을 즐겼다. 그 옛날 재학시절 필자의 등교를 방해한 친구는 대구시내에 살면서 동기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 분명하다.  <5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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