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윤영목] 운동권의 어제와 오늘-1

윤영목(서북미 6ㆍ25참전 국가유공자회 회장)

 

운동권의 어제와 오늘-1 


이 기고문은 1945년 8ㆍ15 해방 전후의 필자 가족상황과 해방 후 수년간의 혼란기동안 필자가 겪은 학창생활을 소개하는 동시에 그때와 오늘의 운동권(?)을 필자 나름대로 비교해보고 현 남북한 관계에 대해 소견(小見)을 피력해보고자 한다.

여기서 언급한 ‘운동권’이란 일종의 이념과 신념을 가지고 정부 제도와 방침에 반발하는 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하는 자들을 뜻한다.

필자는 의사인 부친을 따라 함경남도 압록강변의 혜산진과 중국(만주) 심양 북쪽의 개원(開原)이라는 곳에서 1945년 8ㆍ15해방 당시까지 유소년기를 보냈다. 1944년 개원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교장 추천으로 만주에서 최고 명문이었던 여순(旅順)중학교에 입학해 학교 기숙사에서 통학했다. 

여순은 1905년 러일전쟁 당시 격전지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사건으로 수감되고 교수형에 처해진 여순감옥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필자는 1998년 53년만에 여순을 방문해 그 당시 개방된 여순감옥에 들러 안중근 의사의 흔적을 찾아봤으나 아무런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1945년 7월초순 여순중학교 2학년 재학중 고향에 사셨던 할아버지께서 만주 집에 방문하셔서 부모님과 수일간에 걸쳐 귀국문제를 상의하신 뒤 부모님도 할아버지의 종용에 못이겨 가족전원 귀국을 결정하게 됐다. 

할아버지를 비롯 어머니와 우리 형제자매 8명이 7월 하순 귀국길에 올라 무사히 고향인 경북 청송에 귀향하였으나 아버님은 병원과 자산정리를 위해 홀로 만주에 남아 그곳에서 8ㆍ15 해방을 맞이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일찍 만주일대를 여행해보신 분이며 일본 패망을 이미 예측하고 우리 가족의 귀국종용을 하신 것으로 뒤에 알게 됐다. 

1945년 8월9일 소련군은 일본과의 중립 불가침조약을 무시하고 북만주 일대에 총공격을 가해왔으며 일본 관동군과 만주군은 순식간에 와해되고 말았다. 그 당시 북만주에 거주한 일본인들이 약탈, 강간, 살상 등으로 막대한 피해를 봤다. 

만주에 체류중이시던 아버님은 그 지역 조선인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 조선인대표로 소련군과의 협상에 임하셨다. 이버지는 그후 10월에 평소 친히 지내던 중국인 유지 2명의 보호 하에 신의주 대안도시 안동(현 단동)까지 와서 그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압록강과 38선을 넘어 무사히 고향 땅에 도착하셨다. 

그해 7월, 만주에서 열차편으로 발송한 이삿짐은 8ㆍ15 격동기 와중에 분실되고 우리 가족은 본의 아닌 ‘38따라지’신세가 되고 말았다.   <2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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