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수필-염미숙] 그의 오늘
- 22-01-03
염미숙(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그의 오늘
겨울에 시애틀로 돌아올 거예요. 제 화분들 좀 맡아주세요. 은이는 상자 속에 올망졸망한 화분들을 내게 부탁했다. 대학의 마지막 학기 수업을 한국에서 온라인으로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건요, 제가 만든 건데 다 나누어 드리지 못해서요. 부탁 드려요. 그녀가 내민 것은 노숙자들을 위한 선물세트 열 개였다. 장을 볼 수 있는 현금카드와 성경, 그리고 마스크 스무 개가 까만 천 가방 속에 담겨 있었다. 기특하게도 그동안 아무도 모르게 이런 일을 하고 있었다니, 기꺼이 그 일을 맡았다.
일 년 반 만에 코로나로 잠겼던 주립대학 캠퍼스의 문이 열렸다. 남편과 함께 학교로 학생들을 만나러 가는 날이었다. 환승주차장에 주차하고 버스를 타기로 했다. 주차장으로 운전하는 길에 쓰레기통을 향해 돌아서 있는 은발의 노인을 보았다. 거처를 옮기려는 듯 노인의 옆엔 짐이 차곡차곡 쌓인 카트가 서 있었다. 그가 쓰레기통에 종이 접시와 몇 가지 쓰레기를 밀어 넣었다. 이미 가득 찼는지, 통은 와장창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레기를 토해냈다. 그는 다시 흩어진 것들을 집으려 했다. 그렇게 그의 뒷모습이 멀어져 갔다.
은이가 주고 간 가방이 떠올랐지만 차를 세울 수 없는 곳이라 곧장 환승주차장으로 향했다. 주차가 끝났을 때 버스카드를 집에 두고 온 것을 알았다. 집에 돌아가 카드를 가져오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주차장에 다시 차를 대고 핸드백을 들다가 은이가 준 검은 가방들이 눈에 들어왔다. 캠퍼스 안에서 하차할 테니 노숙자를 만날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손은 이미 가방에 닿아있었다. 냉큼 가방 하나를 집어 들고 버스를 기다렸다.
372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 내 앞자리로 와서 털썩 앉았다. 그 순간 깜짝 놀랐다. 그 뒷모습은 30분 전 차창 밖으로 보았던 바로 그 노인이었다. 그리고 내 핸드백 위엔 은이가 준비한 까만 가방이 그 노인의 등 뒤에 바짝 붙어있었다.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는 섭리였다. 오늘 372버스를 탄 것도, 아침에 그의 뒷모습을 보았던 일도, 깜빡 잊고 버스카드를 가지고 오지 않은 일도, 그리고 지금 그가 내 앞에 앉아 있는 것도.
실례합니다. 말을 걸었다. 그가 내게로 얼굴을 돌렸다. 좀 야위었지만 온화한 얼굴이었다. 선물을 드려도 될까요? 뭔데요? 그가 물었다. 내용물을 알려주었고 그는 가방을 받으며 고맙다고 했다. 버스가 대학가 좀 못미처 어느 동네에 이르렀을 때 그는 고맙다는 인사를 다시 한 번 건넸고 우리도 축복의 말을 건넸다. 버스에서 내린 그가 짐을 차곡차곡 쌓은 카트를 밀며 걷기 시작했다. 카트 바퀴가 시멘트 바닥을 지치는 거친 마찰음을 냈다. 못들은 척 외면할 수 없는 소리였다. 그것은 누구나 들었거나 듣고 있거나 들을지도 모를 살아가는 일의 버거움이었다.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그의 오늘 같은 날이 있다.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넣는 당연한 일마저 힘에 겨운 날, 또는 믿었던 사람에게서 떠밀려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날, 세상이 자꾸 나를 밀어내려는 듯해서 서러운 날이 있다. 우기가 시작되어 을씨년스러운 가을 속으로 그가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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