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수필-김혜자] 따뜻한 마음

김혜자 수필가(오레곤문인협회 회장)

 

따뜻한 마음


온 세상이 회색 물감으로 얼룩진 신축년이 지나간다. 아름다운 세상은 코로나바이러스 재앙으로 열병을 앓고 일상생활이 멈췄지만, 세월은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 지루하게 보낸 한 해가 흘러간다. 언제나 세상은 나보다 앞서가고 있다. 그동안 만나보지 못한 친구와 지인에게 보낼 선물 준비로 비 내리는 거리로 나왔다. 크리스마스의 멜로디가 귀를 즐겁게 해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즐거움이다. 보이지 않는 따스한 온기가 살갗을 스치며 내 옷자락으로 스며든다.

지인의 얼굴을 그리며 적당한 선물을 고른다. 집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쇼핑센터에는 많은 물건이 반값으로 손님을 유혹한다. 충동 구매하기 쉽다. 오랜만에 하는 쇼핑에 들뜬 기분으로 물건을 이것저것 들여다보며 백화점을 오르고 내리는 즐거움에 힘든 줄도 몰랐다.

갈증이 났다. 생주스 코너로 달려가 줄을 섰다. 즉석에서 갈아주는 시원한 향기의 새큼한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8.50전이다. 신용카드를 주니 $10 미만은 안 받는다고 한다. 현찰이 없어 매우 난감하다. 뒷사람이 주문하도록 옆으로 비켜서서 가방을 뒤졌다. 작은 지갑에 있는 동전도 꺼내 보지만, 턱도 없이 모자랐다. 당황하기 시작했다. 현금 기계가 어디 있는지 주위를 살피는데 순간 계산대 아가씨가 오렌지 주스를 건네준다.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니 뒷사람이 주문하며 나의 주스 값도 냈다고 한다. 돌아보니 키가 크고 잘생긴 중년의 남자가 웃고 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적은 돈도 아닌데…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쇼핑몰 안에 있는 현금 기계에서 돈을 찾아 드리겠다고 했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Merry Christmas’ 하고는 웃는 얼굴로 자리를 떴다.

순식간에 떠난 그분에게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도 못 하고 말았다. 그분이 사준 주스 맛은 여태껏 마셔본 것 중 가장 달콤하고, 시원한 오렌지 주스였다. 신선한 과일 향기와 훈훈한 온정이 담긴 주스의 맛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요즈음처럼 메마르고 각박한 세태에 꽃보다 아름다운 마음이 있다는 건 매우 기쁜 일이다. 감동에 젖은 내 마음은 풍선처럼 하늘로 나른다. 세상은 보면 볼수록 참으로 아름답다. 따뜻한 마음과 밝은 웃음을 주는 사람이 있기에 내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난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큰 축복이다. 작은 것이라도 주고받는 온정이 행복지수를 높여주는 사회,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세상이 나는 좋다. 

받는 것보다 주는 일이 얼마나 기쁘던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모에게 받고, 선생님에게 받고, 형제, 친구에게 받은 것이 내가 나눈 것보다 훨씬 많다는 생각이 든다. 주지 않고 받기만 한다면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나오는 스크루지와 무엇이 다른가? 이제부터는 주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주고받는 것은 물건뿐만 아니라 포근한 눈빛도 따뜻한 아름다운 마음도 있다.

이번 크리스마스엔 작은 선물이라도 내가 아는 모든 분과 함께 나누고 싶어 다시 백화점으로 들어가 양말과 장갑을 샀다. 우편물을 전해주는 아저씨와 쓰레기 치우는 아저씨에게 마음 담은 선물을 주고 싶다. 신문 배달하는 학생에게는 따뜻한 목도리를 건네고 싶다. 나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선물로 받은 작은 주스 한잔이 울림의 메아리가 되어 내 가슴을 움직이게 했다. 그 고마움이 오랫동안 긴 여운으로 이어졌다.

몇 달 전의 일이다. 남편과 함께 시내에 있는 공인회계사를 만나러 갔다. 도로 주차 미터기에 필요한 시간만큼 동전을 넣고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때마침 순찰 경찰이 주차 미터기 앞에서 시간이 초과한 차에 벌금 티켓을 떼고 있었다. 바로 옆 주차한 차가 시간이 지난 것을 본 남편은 경찰관이 오기 전에 동전을 옆 차의 미터기에 넣고 시간 연장을 해 주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작은 일이지만 남의 일에 관심을 두고 벌금을 물지 않게 해주는 남편의 자상하고 따뜻한 마음이 나의 입가에 웃음을 남겼다. 소금 3%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 우리 마음 안에 있는 3%의 고운 마음씨가 나와 이웃의 삶을 풍요하게 만든 사실이 긴 여운의 미소로 이어졌다.

누구나 선물을 받고 나면 즐겁고 행복해진다. ‘Pay it forward’라는 말이 있다. 어떤 도움을 받았을 때 감사한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지급한다는 뜻이다. 이런 선행이 잔 물결(ripple effect) 처럼 전달된다면 행복의 바이러스가 세상에 넘칠 것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름다운 낙원이 될 줄로 믿는다.  

찬란한 2022년 호랑이의 해, 임인년(壬寅年)이 밝아온다. 고요한 아침의 문이 열린다. 내 남은 삶이 얼마가 남아 있을지 몰라도 누구든지 나를 만난 사람은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그래야 나도 성숙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금방 비가 올 것 같은 잿빛 하늘도 오늘은 밝아 보인다. 비가 내려도 좋다. 풍족한 느낌으로 가슴을 채운 아름다운 오늘은 복되고 값진 하루였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잊고 살던 행복의 바이러스가 내면의 세계를 들춰내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가슴이 따뜻해진다. 내 마음속에 갇힌 맑은 영혼들이 무지개로 피어나 새로운 행복과 사랑의 흔적을 남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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