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수필-이 에스더] 나의 식탐

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나의 식탐


온몸의 세포들이 먼저 반겼다. 정겨운 분위기에 서른 가지가 넘는 맛깔스러운 반찬들이 한 상 가득했다.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 사뭇 진지하게 작성한 리스트 중 하나가 한정식집에 가는 것이었다. 십여 년 만에 고국을 찾은 나는 그날 그곳에서 너무나 간절하게, 열심히, 후회 없이, 실컷 먹었다. 옆에 있던 막내딸이 어이구, 엄마 뱃속에 동생이 들어 있네, 하는 바람에 얼마나 웃었는지 눈물이 날 정도였다. 

나는 왜 이렇게 열심히 먹을까. 우리는 구 남매다. 커다란 양푼에 담은 비빔밥을 가운데 두고 언니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먹으며, 나는 다섯 살 어린 나이에 밥상에서 펼쳐지는 갖은 전략과 전술을 다 깨우쳤다. 요즘이야 밥상 병법 따위를 익힐 필요가 없는 세상인데도 음식에 대한 태도를 바꾸기가 쉽지 않다.

미국에 살면서 위장이 더 커진 것 같다. 처음엔 미국 식당 음식의 엄청난 양에 기가 질렸는데, 지금은 살뜰히 다 먹고 있으니 몸과 마음이 아메리카나이즈 되었다고 해야 하나. 마켓의 선반에 진열된 패키지를 보면 슈퍼, 메가, 자이언트라는 말을 붙여 음식의 부피와 양을 점점 늘려가고 있다. 포장에 쉐어 사이즈라고 적힌 초콜릿은 몸과 마음이 나눠 먹으라는 것인지 다른 사람과 나눠 먹는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다. 사람들의 식탐과 이를 자극하는 상술이 어우러져 세상이 과식과 폭식의 사회로 치닫고 있는 것 같다. 이러다간 내 위마저 자이언트 사이즈로 변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식습관을 이르는 말 중에 미식, 탐식, 과식 등이 있는 것은 몸과 마음이 음식을 함께 먹기 때문이 아닐까.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먹는 데서 비롯된 걸 보면 식탐의 뿌리는 에덴동산 어디쯤에까지 닿아 있을 것 같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식탐을 칠죄종(七罪宗)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만일 내가 천주교인이었더라면 먹는 일로 인해 누구보다도 고해성사를 많이 했을 것이다. 

오래전 사극 드라마 <무신>의 한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어느 날 아기에게 젖을 먹이던 엄마들이 마을에서 한꺼번에 사라지면서 갓난아이들이 굶어 죽는 일이 생겼다. 까닭인즉 맛이 좋은 애저고기를 얻기 위해서 수유모(授乳母)들을 잡아다가 한 곳에 가둬놓고 새끼 돼지에게 사람 젖을 먹이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장면이 잊히지 않아 한동안 돼지고기를 먹지 못했다. 또 한 가지, 고대 로마인 플리니우스는 돼지고기에서 무려 쉰 가지의 맛이 난다며 그 맛을 극찬했다니 도대체 그는 어떤 미감을 가졌을까. 그의 섬세한 미감을 충족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탄것들의 희생과 사람들의 수고가 있었을까. 그가 먹었던 음식에는 어쩐지 수많은 약자들의 뜨거운 눈물이 녹아있을 것만 같다. 

몽골 유목민들은 양을 잡으면 먼저 피의 일부를 하늘에 뿌리며 음식을 허락한 신과 희생된 동물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난 후에 요리해서 먹는다고 한다. 생명을 대하는 유목민들의 마음이 참 따스하다. 그들의 깨끗한 영혼이 미각의 충족만을 위해 칼을 휘두르는 자들에게 베인 상처를 싸매 주는 것 같다. 누구나 저들과 같은 마음으로 음식을 대한다면 세상 어디서나 천국의 식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오랜만에 뷔페식당엘 갔다. 운동장만 한 홀은 사람들과 음식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딴 세상 이야기인 듯 너나없이 행복한 표정이었다. 문득 순간의 식욕을 참지 못하고 죽 한 그릇에 소중한 장자의 권리를 팔아버린 ‘에서’가 떠올랐다. 에서처럼 먹는 것에 마음이 쏠려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 어리석은 순간들이 나에겐 없었을까. 넘치도록 풍요로운 음식 앞에서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올해도 식탁이 풍성한 추수감사절을 지냈다. 팬데믹 때문인지 감사절의 의미가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런데도 나는 감사를 헤아리기보다 풍성하고 화려한 식탁을 차리기에 더 분주했다. 그 와중에 며칠째 거북하던 속이 이제 좀 편해졌다. 소식(小食)을 다짐하지만 여전히 식탐을 다스리지 못해 탈이 나고 후회하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욕심을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삼으라’는 음식에 대한 경구를 깊이 새기고 마음공부에 힘써야 할 것 같다.

음식이 내게로 온 먼 길을 헤아리며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식탁을 대할 날이 언제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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